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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최경환의 남은 카드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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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4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취임 후 6개월이 지났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그는 내년 구조개혁에 승부를 걸 전망이다. [뉴시스]

최경환 경제팀이 출범한지 6개월이 지났다. 6월 13일 지명 첫날부터 그는 “한겨울에 여름옷”이라며 부동산규제 완화를 들고 나왔다. 이후 융단폭격식으로 각종 경기부양책을 쏟아냈다. 실세 부총리라는 평가에 걸맞게 그는 경제팀 인선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국토교통부·산업통상자원부는 물론 국세청에도 그의 우군이 포진했다. 금리 관할권을 놓고 기획재정부와 각을 세웠던 한국은행까지도 두 차례나 금리를 낮췄다. 적어도 2기 경제팀에서 정책의 엇박자는 보이지 않았다. 시장의 평가도 호의적이었다. 가만히 손 놓고 있는 것보단 그래도 뭔가 해보려 애쓴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한데 6개월이 지난 뒤 받아 든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다. 경제성장률은 4분기 연속 0%를 기록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5개월째 1%대로 기고 있다. 시장은 디플레이션 우려에 잔뜩 위축됐다. 국가미래연구원이 15일 전국에서 100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 결과도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에게 박근혜 정부의 전반적인 경제운용에 대해 평가해달라고 묻자 응답자의 72.6%가 ‘잘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광두 미래연구원 원장 “전세난이 더 심해지고, 기업 투자와 민간소비는 개선될 조짐이 안 보이는 데 따른 평가”라고 말했다.

 대통령제 아래의 경제부총리에게 6개월만에 경제를 살려보라고 주문하는 것부터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경제부총리가 전방위로 경기부양 드라이브를 걸고 나섰는데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이면엔 부총리라는 자리의 무게가 달라졌기 때문이란 지적도 나온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경제를 살리는 것도, 침체의 바닥으로 주저앉는 것도 모두 부총리 개인의 역량과 리더십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달라진 경제부총리의 위상과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경제부총리는 1963년 처음 도입된 뒤 50년 넘게 명칭이 그대로다. 하지만 같은 부총리라도 예전과 지금의 역할과 위상은 상전벽해라고 할 만큼 딴판이다. 성과도 다를 수밖에 없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맞춰 성장이 본격화된 60~70년대 경제부총리는 ‘규제 제조자’이자 ‘자원의 배분자’자였다. 정부가 자원을 배분하고 민간기업을 이끌던 때라 모든 분야에서 질서와 규제가 필요했다. 한국 경제는 이를 통해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부총리제 폐지·부활도 위상 깎는 데 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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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 경제정책 주도권이 옮겨갔다. 이른바 ‘87년 체제’로 불리는 이때를 분기점으로 시장과 정책의 주도권이 각각 관(官)에서 민(民)으로, 관에서 국회로 서서히 넘어갔다. 이때부터 정부 정책은 차츰 힘을 잃어갔고, 이제는 정부안이 말 그대로 정부의 ‘안(案: 아이디어)’일 뿐인 시대가 됐다.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해 타이밍을 놓치거나, 발표만 할 뿐 실행되지 않는 법안과 정책이 쌓이게 됐다. 윤증현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금처럼 국회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체제에선 경제부총리가 열 명이 있어도 정책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행정부의 위상 약화가 경제부총리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복지, 국방,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정책 결정이 예전처럼 행정부의 일방통행으로 흐를 수 없게 됐다. 여론에 바탕을 둔 사회적, 정치적 타협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추세이기도 하다.

 정부 내 위상도 많이 약화됐다. 경제기획원 시절 부총리는 장관급 부처보다 격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예산 배분권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무용담처럼 전해지는 60~70년대 부총리들의 리더십도 이런 정책수단에서 비롯됐다. 부총리제가 두 차례(98~2000년, 2008~2012년)나 폐지된 것도 부총리 권한 약화를 부채질했다. 한 번 없어진 권위가 명칭만 되살렸다고 다시 살아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관료조직의 특성상 부처 이기주의가 극심해 과거에도 장관들은 부총리의 말을 순순히 듣지 않았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당시 세종로 정부청사 소회의실에서 열린 ‘녹실회의’였다. 카페트가 단지 녹색이라 붙여진 이름인데 60~70년대 부총리들은 부처 간에 이견이 있으면 장관들을 이곳에 붙들어놓고 군기를 잡았다. 저녁도 거른 채 통행금지 직전까지 회의를 하게 하면 결국 장관들이 백기를 드는 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식의 독불장군식 리더십은 통하기 어렵다. 지난해 재산세 인하를 놓고 장관들이 현오석 부총리의 방침을 따르지 않아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나서 조정한 것은 과거에는 없던 일이다. 경제부총리의 강력한 권한이던 예산과 세제 카드도 무디어졌다. 적자재정을 꾸려나가고 있어 예산 운용의 폭이 좁고 세입결손에 허덕이는 상황이어서 세제 혜택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구조개혁, 노사정 대타협 이뤄야 힘 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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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부총리로선 사면초가 형국이다. 시장의 기대치는 높은데 칼은 무디어졌고 그나마 쏠 수 있는 화살도 별로 없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는 ‘세 번째 화살’ 즉 구조개혁으로 보인다. 돈을 풀어 경기부양 드라이브를 걸어봐야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어 돈이 흐르질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최경환 경제팀이 내년 정책의 화두로 ‘경제혁신’을 내건 이유다. 그 첫 표적이 노동시장이다. 최근 최 부총리가 한 상가에서 이기권 노동부장관을 만나 내년 노동시장 개혁을 강하게 주문한 대목에서도 그런 절박감이 엿보인다. 2016년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에선 정년이 60세로 연장된다. 그러나 국내 임금체계는 아직도 해마다 임금이 자동으로 오르는 호봉제가 대세다. 가뜩이나 경기가 가라앉은 마당에 인건비 부담이 갑자기 늘게 돼 기업으로선 일자리를 늘리기 어렵다. 이를 손보지 않고선 일자리 확보는 공염불이 될 공산이 크다. 일자리가 늘지 않고선 경기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노사정 대타협은 난제 중에서도 난제다. 기득권을 쥔 정규직 노동조합을 설득해내야 한다. 노사정위원회가 가동되고는 있지만 벌써부터 불협화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시간도 촉박하다. 내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 인상에 나서면 국제경제질서는 다시 한번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신흥국인 한국으로선 미국으로 환류하는 달러를 붙잡기 위해 금리를 따라 올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금리 인상은 자칫 1000조원 가계부채의 뇌관을 건드릴 수 있다. 최경환 경제팀으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덫에 걸릴 수 있다. 그 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 적어도 내년 상반기 중 노동시장에서 변화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면 그의 개혁 드라이브는 갈수록 힘이 빠질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아직은 청와대와 최경환 경제팀 사이에 불협화음은 들리지 않는다. 최근 은행권에서 일부 예상치 못한 인사가 이뤄지긴 했지만 경제정책에 관한 한 청와대가 최 부총리와 엇박자를 낸 흔적은 찾기 어렵다. 다만 이젠 대통령의 힘 실어주기나 개인적 카리스마만으론 경제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개발시대가 아니다. 뚝심과 실행력보다 사회적 합의와 타협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 막후에서 경제정책을 조율하는 것보다 국민이나 이해당사자를 상대로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는 게 급선무다. 여론을 등에 업어야 국회도 움직일 수 있다. 김동원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제는 부총리가 복잡한 일을 조정하는 코디네이터로서 역할해야 한다”며 “국회의원과 다른 부처 장관을 설득하려면 한 발 더 공부하고 선제적으로 정책카드를 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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