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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덕', 그리고 '중국 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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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준현
김준현 기자 중앙일보 팀장 겸 경제에디터
김준현
경제부문 차장

‘국내 면세점 시장규모 세계 1위, 명동 화장품점 2년6개월 사이 38개에서 127개로 급증, 서울 시내 관광호텔 3년 만에 45%(66개) 증가’.

 난이도 하급의 퀴즈 하나.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공통 원인을 꼽는다면? 그렇다. 모두 중국인의 한국행이 늘면서 생긴 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경제 성장의 상당 부분은 중국 덕이다. 2003년 이후 중국은 미국을 밀어내고 우리의 최대 수출국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금융도 예외는 아니다. 주식시장에선 미국·일본 다음으로 투자액이 많고, 게임·영화·드라마 등 콘텐트산업, 기업 인수합병 시장에서 이미 중국은 큰손으로 부상했다.

 이웃에 이런 든든한 친구가 하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다. 그런데 행과 불행은 손바닥 뒤집기 같은 것. ‘중국 덕’이 ‘중국 탓’으로 반전되는 건 순식간이다. 이미 진행형이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내놓은 보고서는 이런 불안을 가중시킨다. 우리의 10대 수출품목을 8개 산업으로 재구성해 세계 시장 점유율을 기준으로 비교해봤더니 무려 6개 산업에서 중국이 우리를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해양·석유화학·정유·철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의 자랑 스마트폰·자동차에서도 중국의 점유율이 더 높았다. 우린 반도체와 액정표시장치(디스플레이)에서 간발의 차이로 앞서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건 중국의 부상보다 우리 안의 혼란이다. 95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했다가 김영삼 정부의 미움을 산 적이 있었다. 4류 정치에서도 우리가 이만큼 살 수 있게 된 건 경제가, 좁게는 기업이 버텨준 덕분이다. 그런데 그 경제가 지금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재계 10대, 20대 기업 리스트를 펼치고 한번 보라. 세계 시장에서 떵떵거리는 우리 기업이 몇 개나 되는지. 그나마 세계적 수준이라는 삼성·현대차마저 요즘 힘에 부치는 모습이다.

 소설가 복거일은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란 책에서 한국의 ‘핀란드화’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핀란드화란 44년 이후 핀란드가 인접한 강대국 소련의 압도적 영향 아래 주권의 손상을 입으면서 생존한 경험을 가리킨다. 복거일은 중국에 대한 한국의 핀란드화 가능성을 얘기하면서도 “한국이 스스로 어리석게 대응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핀란드화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말 우리는 ‘어리석지 않게’ 대응하고 있는 것일까. 양보할 건 하더라도 당당하게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킬 외교 능력을 구사하고 있나. 이런 능력의 원천이 되는 국민적 합의와 단결은 이뤄지고 있나. 자신 없다. 오히려 이념 간, 세대 간 갈등으로 한국 사회는 혼돈이다. 국가의 조정력도 한계를 드러낸 지 오래다.

 핀란드는 91년 소련이 스스로 무너지면서 핀란드화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우리 곁에 있는 중국, 무너지기는커녕 더 강해지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의 고민이 다시 우리앞에 놓였다.

김준현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