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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자꾸 까먹는 당신, 삶이 재미없어서 그런 거예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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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01 스트레스가 건망증 낳는다

Q (치매일까 겁난다는 직장인)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지 3개월이 돼갑니다. 치료 후유증인지 최근 기억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회의 중은 물론 편하게 주변 사람들과 얘기할 때도 특정 단어나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대화를 이어 나가기 힘들 정도입니다. 심지어 오늘은 친구 몇 명이 같이 쓰는 통장에서 내 개인 명의 통장으로 돈 얼마를 이체했는데, 도무지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 겁니다. 이러다가 치매에 걸리는 게 아닌지 덜컥 겁이 납니다. 병원에서는 그저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여유를 가지라고 하는데 불안하기만 합니다. 기억력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A (가끔 깜빡깜빡 한다는 윤 교수)중년 이후 자꾸 건망증 증세를 보이면 치매를 걱정합니다. 요즘은 젊은 세대도 건망증을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얼마 전 한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심지어 초등생끼리 서로 “너도 건망증 심하냐”는 말을 주고 받더군요. 세대 불문 건망증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합니다.

 우울증까지는 아니더라도 뇌가 지쳐 집중력이 떨어지면 건망증이 옵니다. 기억을 하려면 집중해서 새 정보를 뇌에 저장하고 필요할 때면 다시 집중해서 꺼내야 하는데, 뇌가 피곤하면 집중력이 떨어져 새로운 걸 학습해서 저장하는 기능이 떨어집니다. 계좌이체를 한 후 이유를 까먹는 일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는 거죠.

 스트레스 증상 중 우울감이나 불면증보다 더 오래 남는 게 건망증과 무기력감입니다. ‘마음’ 입장에서 생각하면 마음의 주인이 놀아 주지는 않고 내달리기만 하니 세상이 너무 재미없어서 집중력을 떨어뜨려 건망증을 만들지 않나 싶습니다. 무기력감도 마찬가지죠. 사는 게 재미없으니 뇌에 공급하는 에너지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결국 스트레스로 인한 건망증을 해결하는 방법은 뇌를 즐겁게 해주는 것입니다. 즐거운 일을 하다보면 집중력이 살아납니다. 반면 집중력을 키우겠다고 뇌를 더 못살게 굴면 건망증은 결코 좋아지지 않습니다.

02 가족력이 꼭 치매로 가진 않아

Q 치매 걱정을 하는 건 가족력 때문입니다. 함께 사는 할머니가 현재 치매입니다. ‘착한 치매’라는 말이 있던데, 우리 할머니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배고프다고 말하면 라면 5개를 연속으로 끓여줄 때도 있습니다. 라면 끓여준 걸 잊어버리고 계속 새로 끓이는 거죠. 또 아이처럼 화도 잘 내고 먹는 것에 굉장히 집착합니다. 심지어 의부증이 생겨서 할아버지가 윗집 여자와 바람 났으니 빨리 이사 가야겠다고까지 말합니다. 증세가 점점 심해지는 할머니를 보며 나 역시 이런 전철을 그대로 밟는 게 아닌가 싶어 점점 더 걱정됩니다.

A 치매 걸린 가족이 있으면 치매에 대한 염려가 당연히 늘어나죠. 요즘은 나이든 사람뿐 아니라 젊은 사람도 건망증을 많이 느끼는데, 건망증을 치매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에 더 걱정을 합니다.

 우선 말하자면 기억력이 떨어진 걸 알고 그래서 치매 걱정을 한다면 절대 치매가 아닙니다. 기억력이 떨어진 걸 아는 것을 주관적 기억력 감퇴라고 하는데, 이를 인지한다는 건 치매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실제 치매에 접어들면 오히려 ‘나는 정상이다, 병원 갈 필요 없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다음 말하고 싶은 건 가족력입니다. 가족력이 있다고 꼭 치매에 걸리는 건 아닙니다. 물론 가족력이 있으면 발병 위험도가 올라가지만 가족력이 있는 것과 유전 질환은 다릅니다. 치매 환자 중 드물게 유전 경향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아주 예외적입니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보면 가족력보다는 생활 습관이 더 큰 영향을 끼칩니다. 집안에 치매환자가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몸 관리 안하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가족력이 있어 늘 조심하고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게 치매 예방에 더 낫다는 얘기 입니다.

 사연주신 분 할머니가 아이같은 행동을 보이는 건 뇌가 아이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욕구를 통제하는 기능, 그리고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거죠. 화를 잘 내고 식탐이 느는 것은 욕구가 조절되지 않아 일어나는 일입니다. 의부증 증상도 자주 보입니다. 사랑과 질투, 그리고 소유욕과 의심은 동전 앞뒷면처럼 붙어있는데 마음 속 상상과 실제 현실의 구분이 잘 안되다보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나 할까요.

03 치매 간병 가족에겐 응원이 필요해

Q 건망증이 치매로 갈까봐 지금부터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사실 또 다른 걱정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입니다. 할머니 치매가 악화하기 시작한 5년 전부터 둘째 아들 며느리인 저희 부모님이 할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큰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기 싫어하는 것 같아 보이자 다혈질인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게 된 거죠. 처음엔 착한 우리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며 열심히 간병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지친 모양입니다. 그래서 넌지시 요양시설을 이용하자고 의견을 냈지만 큰집에서 ‘그럴 수 없다’고 눈치를 주고, 아버지 역시 ‘조금 더 고생하자’고만 합니다. 자기 인생이라곤 없는 어머니가 우울증이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A 2011년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케이티 버틀러 기자가 쓴 ‘무엇이 아버지의 심장을 망가뜨렸나(what broke my father’s heart)’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미국국립과학저술인협회상과 미국의학전문기자협회상 수상작으로, 기자가 자기 가족 이야기를 쓴 것이었는데요. 대학교수 재직 중 뇌졸중을 앓고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다보니 신체적으로 탈진하는 것은 물론 정체성마저 사라져버린 어머니가 주인공이었습니다. 의료기술 발달로 수명은 늘었지만 삶의 질이 받쳐주지 못해 생기는 환자와 간병 가족의 고통을 담아 사회적 이슈를 일으켰죠.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 심장에 문제가 생기는데, 어머니는 연명 치료를 거부합니다. 자식에게 본인이 겪었던 간병의 고통을 넘겨주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죠. 간병 스트레스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입니다.

 사연주신 분 어머니는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스스로 택한 아름다운 희생이지만 치매 노인을 돌봐야하는 가족의 스트레스는 엄청납니다. 내 에너지 전부를 간병에 쓰다보니 정서적인 탈진이 오고, 삶의 균형이 깨지고, 그러다보면 내 삶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상황까지 올 수 있습니다.

 치매를 다룰 때 환자 치료만큼 중요한 게 간병 가족에 대한 정서적 지지입니다. 자식이 부모 모시는 건 당연한 게 아니냐는 식의 접근은 정말 못된 생각입니다. 아름다운 희생마저 당연한 의무로 격하시켜버리니까요. 간병 스트레스만으로도 힘든데 가족의 이런 태도는 더 지치고 슬프게 만듭니다. 가장 중요한 건 어머니에게 모든 간병을 맡겨서는 않된다는 겁니다. 순번을 정해 간병을 나눠야 합니다. 요양 시설은 무조건 나쁘다는 것 역시 잘못된 편견입니다. 전문적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집보다 이런 요양시설에서 더 잘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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