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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손자 부검한다니 할아버지가 도끼를 던집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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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진 교수는 법의학을 대중에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관련 잡지에 칼럼을 쓰고 책을 내는 건 그런 이유다. 최근엔 예술 속 법의학 이야기를 담은 책을 쓰고 있다.

과학수사. 이젠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은 분야다. 벌써 15년째 이어오는 미국 드라마 CSI(Crime Scene Investigation)를 비롯해 숱한 수사 관련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덕분이다.

미드(미국 드라마) 속 법의학자는 늘 첨단 장비의 도움을 받아 완벽하게 보존된 증거를 분석한 후, 결정적으로 죽은 자(사체)와의 대화(부검)를 통해 범인을 밝혀낸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한해 국내에서 발생하는 변사 사건(자살·살인 포함)은 2만5000여 건이나 되지만 이를 맡아야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관은 23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은퇴했거나 학계에 있는 관련 인력을 모두 합해도 5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국내 1호 법의관인 문국진(89) 고려대 의대 법의학과 명예교수가 없었더라면 아마 이 정도 인력조차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인생을 통해 한국 법의학의 역사를 돌아봤다.

법대생이 되고 싶었던 의대생

사진 윗쪽부터 1978년 고려대 법의학교실에서 문 교수가 제자들에게 실험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1968년 국과수 법의관 당시 제주 변사사건 부검을 하고 있다. 이처럼 야외에서 부검을 한 적도 많다.

문 교수는 만주와 몽고 관련 신문인 중국 만몽일보의 평양지국장이었던 아버지의 1남2녀 중 둘째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제 때부터 법원이나 경찰서에서 중국 사람들 통역을 할 정도로 중국어를 잘하다보니 중국 신문을 평양에 배포하는 일을 한 거다. 문 교수가 아버지 직업과 아무 상관없는 의대에 간 건 순전히 어머니 때문이다. 당시에도 벌써 평양은 의사 벌이가 상당히 괜찮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평양에서 알아주는 명문 평양고급중학교와 평양고등학교에 들어간 똑똑한 아들에게 “의대 아니면 월사금(수업료) 안 내주겠다”며 의대를 권했고, 그는 어머니 소원대로 평양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원래 법대에 가려고 했거든. 법대는 김일성대학밖에 없는데 거기는 소련 사상 위주로 가르친단 말이에요. 그것도 마음에 걸리던 차에 어머니가 월사금도 안 대준다니, 할 수 없이 의대에 진학했디요.”

대학 3학년 때인 1950년 6·25 전쟁이 터졌다. 의대 다니던 친구들 모두 훈련에 동원됐지만 문 교수는 배구 국가대표로 뽑혀 소련팀과 연습하느라 훈련에 빠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천운이었다. “말이 훈련이지 군입대였던 거예요. 인민군 위생장교로 데려갔는데 얼마 안 있어 국군이 밀고 올라와 대개 죽었디요. 난 키 덕을 봤디만. 내 키가 178cm인데 당시로선 굉장히 큰 거디.”

이때 또 한번 천운을 잡았다. 조선일보 주필을 지낸 고(故) 선우휘를 만난 거다. 50년 10월 국군이 38선을 돌파해 올라왔을 때 선우휘는 국군 정훈국 평양분실에 있으면서 살아남은 학생을 모아 정훈국으로 보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가족보다 일찍 서울에 왔고, 대구육군병원을 거쳐 53년 서울대 의대에 편입을 했다. 가난한 실향민이었지만 정훈국 봉급을 모아 첫 등록금을 마련하고 이후 줄곧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았다.

헌책방이 바꾼 운명

『한가닥의 털은 말한다』 일본 법의학 권위자인 후루하다 다네모도 교수가 68년 문 교수를 만나 선물한 책.

서울 의대에 편입한 53년 여름 어느 날, 문 교수는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종로의 한 헌책방에 들어갔다. 비가 그칠 때까지 서가에 꽂힌 책을 둘러보던 중 『법의학』이라는 일본책이 눈에 들어왔다. 법의학이라니, 법에 무슨 의학이 있나, 아니면 의학 속에 법이 있는 건가. 궁금증에 책을 집어 펼쳤는데 첫 장에 쓰여진 말이 단숨에 그를 사로잡았다. ‘사람에게 중요한 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생명이요. 하나는 권리다. 임상 의학은 생명을 다룬다. 법의학은 인간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이다.’

“권리를 존중하는 의학이 법의학이라니. 가슴이 마꾸 뛰는 거야요. 이런 대단한 걸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이거슨 내가 반드시 해야겠다. 그 책을 사와서는 그길로 밤새서 다 읽었어요.”

반드시 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법의학을 배울 곳이 없었다. 일제 때는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 의대에 법의학 교실이 있었지만 해방 이후 미국식 교육을 따르면서 없앴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에 당시 의대 학장이던 병리전문의 이제구(1911~86) 교수를 찾아갔다. “법의학을 하고 싶은데 가르치는 데가 없으니 병리학 교실에서라도 받아달라”고 했더니 “그런 사람 필요없다”는 싸늘한 답이 돌아왔다. “처분만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돌아왔는데 딱 사흘 후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내무부(안전행정부 전신)에서 과학수사 연구소를 건립하는데 지망생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며 문 교수 의사를 물었다. 답은 당연히 ‘예스’였다. 그렇게 55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창설 멤버가 됐다.

편지로 공부하다

1986년 고려대 법의학교실 창설 10주년 기념식, 국내 1호 법정신학자 최상섭 송탄병원 부원장(동그라미 왼쪽)과 국내 1호 법의학자 문국진 교수(가운데), 국내 1호 법치의학자 김종열 전 국과수 원장(오른쪽)가 모두 모였다.

『법의학』과의 첫 만남부터 국과수 1호 법의관이 된 후에도 문 교수는 늘 배움에 목말랐다. 국내에 아예 관련 분야가 없던 터라 그에게 전문지식을 가르쳐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가 아는 이름이라곤 『법의학』 저자인 도쿄대 의학부 법의학과 후루하다 다네모도(古畑種基) 교수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과 국교가 단절된 때라 직접 가서 만나기는커녕 편지조차 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이름을 잊지 않고 늘 머릿속에 담아뒀다.

그러던 1964년 홍콩에서 무역상을 하던 잘 아는 형이 한국에 와서 점심을 산다기에 다짜고짜 후루하다 교수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엔 “귀찮다”며 거절했지만 “한국에서 공부할 수 없어 그러니 도와달라”는 말에 결국 3년간이나 불평 한 번 없이 메신저 역할을 했다. 문 교수가 “당신 책을 보고 법의학에 눈을 떴다”고 첫 편지를 썼더니 후루하다 교수는 “한국에도 법의학이 꼭 필요하다”며 격려의 답장을 보내왔고, 이를 계기로 서로 얼굴 한 번 보지 않은채 사제지간이 됐다.

서울에서 홍콩을 거쳐 도쿄로, 그리고 답장 역시 홍콩을 거쳐 서울에 왔다. 아무리 서둘러도 1년에 기껏해야 6통 정도 주고 받을 수 있었다. 편지를 한 번 보낼 때마다 앞뒤를 빼곡히 채운 A4 크기 용지 7~8장씩 궁금한 내용을 써서 보내면 후루하다 교수도 비슷한 분량의 답을 보내왔다.

얼굴을 직접 본 건 편지 왕래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67년이다. 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67년 일본에서 암학회가 열렸는데 여기 참석했다가 당시 경찰과학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루하다 교수와 만났다. 일본 법의학 기틀을 잡은 후루하다 교수는 문 교수가 자신의 옛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지 무척이나 아꼈다. 후임 우에노 쇼키츠(上野正吉) 교수를 소개시켜준 것은 물론 외국인 최초로 일본 법의학회 회원이 될 수 있도록 추천해줬다.

그놈의 유교사상 … 도끼 날아들다

문 교수가 법의관을 마음먹은 순간부터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어머니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송장 만지는 더러운 일을 왜 하느냐”는 거다. 의대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외과의사로 그를 점찍었던 간암 명의 장기려(1911~95) 박사가 펄쩍 뛰었다.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할 정도로 봉사하는 삶을 살았던 장 박사조차 “법의학은 학문도 아니야, 의사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그건 하빠리(지위 낮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야”라며 만류했다. 하지만 문 교수는 “하빠리가 되도 좋다”며 법의학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바로 유교사상 때문이다. 유교 관념이 몸에 밴 사람들에게 시체 부검은 죽은 사람을 한 번 더 죽이는 천인공로할 일이었다. 초기엔 부검실이 따로 없어 사과 궤짝 네 개를 이어 시체를 올려놓고는 부검을 하기도 했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은 사람들 인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사고로 손자를 잃은 한 노인은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하자 경찰한테 끌려나가면서 도끼를 문 교수를 향해 집어던졌다. 문 교수 머리 위로 도끼가 스쳤다. 하마터면 문 교수 머리에 박힐 수도 있었다.

“지금도 부검을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들 하는데 50~60년대는 얼마나 더 심했겠어요. 하다하다 5년 만에 포기했디요. 아, 이래서 선생님(장기려 박사)이 하지 말하고 하셨구나 싶어 이제 받아달라고 찾아갔디요.” 그런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 박사는 호통을 쳤다. “나쁜 놈, 5년이나 판 우물을 버리려고. 넌 나쁜 놈이야. 안 받아, 나가.” 그는 그렇게 다시 법의학의 세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후배 양성을 위해 70년 고려대 법의학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줄곧 국과수를 지켰다.

장사 하겠다고 살해현장을 청소하다니

지금은 과학수사라는 개념이 점차 자리를 잡으며 현장보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전혀 그렇지 못했다. 하물며 그가 법의관 생활을 시작할 당시엔 오죽했겠나.

“옛날에는 현장보존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디요. 그러다 보니 증거물 체취가 부족했어요.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서 못 잡는 그런 일들이 막 생기는 거야요. 그렇다고 증거 없이 잡을 수도 없으니 그대로 미제 사건이 됐디요. 돌이켜보면 안타까운 사건이 참 많아요.”

그는 65년 동대문시장에서 시체로 발견된 한 여성 얘기를 꺼냈다. 당시 대학생이던 남자친구가 유력한 용의자였는데 결국 미제로 남았다. 부검 결과 손톱이 중요한 증거로 쓰일 수 있겠다고 판단해 경찰에 남자친구 손톱을 깎아서 가져오라고 했는데, 양손 손톱을 섞어오는 바람에 증거로 쓸 수가 없었다. 심지어 97년까지만 해도 어이없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대표적인 게 영화로도 나온 97년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 사건이다. 당시 국과수에 있던 문 교수 제자인 서울대 이윤성 교수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살해 현장이 말끔히 물청소된 뒤였다. 가게 주인이 장사하려고 핏자국을 지운 거다.

미드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미국은 법의관 제도가 있어서 변사 사건이 발생하면 법의관이 가장 먼저 현장에 가 현장 지시를 내린다. 증거물이나 사체 처리 등등 현장의 모든 일을 법의관이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증거물 훼손 같은 어이없는 일은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는다.

“법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게 현장검증이에요. 그게 제대로 안되면 부검은 하나마나예요. 눈가리고 하는 거랑 똑같아요.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경찰에 쫓기다 변사체로 발견된) 유병언 봐요. 사체를 한 달이나 방치하다니, 이런 건 말이 안돼요. 법의관제도가 시급해요.”

국과수 사내 커플, 1호 법곤충학자를 낳다

문 교수는 국과수에 근무하던 57년 역시 국과수에 다니던 약사 이복선(81)씨와 결혼했다. 당시 아내는 동물분석을 주로 했는데 문 교수가 부검하며 나온 내용물이나 혈액을 갖다주면 아내가 분석을 했다. “다른 사람은 법의학이라면 다들 싫어하는데, 그 사람은 잘 아니까 편했디. 고향도 같고.”

문 교수와 문 교수 장남이자 국내 1호 법곤충학자인 고신대 문태영 교수(오른쪽)

아내는 결혼 후에도 일을 하고 싶어했지만 문 교수 어머니가 펄쩍 뛰었다. 아들 혼자 하는 것도 끔찍한데 며느리까지 하는 거 못봐준다며 집에 눌러 앉힌 거다. 아내는 그렇게 전업주부로 문 교수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뒀다. 장남과 장녀는 생물학을 전공하고 막내딸은 일본어를 전공했다.

장남인 문태영 고신대 생명과학과 교수는 국내 1호 법곤충학자다. 법곤충학자란 사체 속 구더기나 알 등을 통해 사망 시기 등을 밝히는 사람이다. 2002년 대구 개구리 소년 유골 발견 당시 유골 주변 곤충 상태를 판별해 사망 시기 등을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원래 생물학 전공인데 영국 유학갈 때 내가 시간나면 거기 법곤충학 교수가 어떻게 하는지 좀 보고 오라고 했디요. 그랬더니 이놈이 가서 그걸 공부해 온 거야.”

문 교수는 국내 1호 법곤충학자만 배출한 게 아니다. 법정신학 1호, 법치의학 1호 다 문 교수와 인연이 깊다.

1960년대 한강나루터 살인사건은 과학수사의 쾌거로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공로패를 수여할 정도였다.

“법정신학이라는 건 정신감정을 해서 이놈이 진짜 정신병자인지 그런 척 하는 건지 판별하는 거예요. 내 제자 중에 최상섭(송탄중앙병원 부원장)이 국내 1호지.”

그런가하면 1960년대 한강나루터 살인사건을 계기로 국내에 법치의학이 도입됐다. 이 역시 문 교수가 길을 냈다. 딸을 데리러 한강나루터에 나갔던 엄마가 시체로 발견됐다. 사체에 난 이빨자국을 보고 대부분 인근 공사장 인부 가운데 성도착자 짓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문 교수가 치흔을 통해 살해자 남편이 진범이라는 걸 밝혔다. 과학수사의 쾌거라며 당시 언론이 떠들썩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불러 원하는 걸 다 해주겠다고 할 정도였다.

“진급을 원하냐, 포상을 원하냐길래 대뜸 법치의학자를 만들어 달라고 했디요. 그 자리에서 내무부장관한테 전화를 돌리더니 바로 법치의학자를 만들라고 하더라구요. 그 사람이 바로 1호 법치의학자이자 6대 국과수 원장을 한 김종열 원장이디요. 그렇게 한국에 법치의학자가 탄생했지.”

국민의 죽음에 물음표를 남기지 말아야

“옛날에 학회에 가면 나 혼자였는데 지금은 50여 명 됩니다. 국내 42개 의과대학 가운데 13곳에서 법의학교실을 만들었어요. 이만하면 성공한 거 아닙니까.”

문 교수는 국과수를 나온 이후에도 종종 전국의 사건 현장에 불려가 자문역할을 한다. 그러는 틈틈이 대중을 위한 법의학 책도 쓴다.

“법의학이 대중화하는 날까지 할 일이 많아요. 뭐든 쉬워야 관심을 갖디요. 후진 양성은 어느 정도 했어요. 이제 그네들이 의무감을 가지고 또다른 후학들을 키워야죠. 내가 할 일은 왜 법의학이 필요한가를 알리고 니즈를 창출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국민의 죽음에 절대 물음표를 남기지 않는 일, 그게 바로 우리 법의학자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글=김소엽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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