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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랑의 작품 장난감 삼아 구기고 비틀며 창작 체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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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호 15면

미국 마이애미 디자인 디스트릭트에 마련된 루이비통의 ‘피에르 폴랑 - 형태의 유희’ 전시 공간의 모습.
왼쪽부터 U자 모양의 나무 책꽂이와 자유자재로 각도를 바꿀 수 있는 소파들이 전시돼있다.

아이들은 두 살을 넘기면서부터 도형을 갖고 논다. 정사각형 하나를 오려 일곱 개의 도형을 만든 뒤 작아진 조각들을 가지고 이것저것 짜맞춰 보는 칠교(七巧)놀이를 한다. 중국에서 처음 시작돼 ‘탱그램(Tangram)’이라 불리며 세계로 퍼져나간 놀이다.

루이비통이 되살린 모더니즘 가구 명장 피에르 폴랑

2일(현지시간)부터 닷새 동안 미국 마이애미 디자인 디스트릭트에 마련된 프랑스 가구 디자이너 피에르 폴랑(1927~2009)의 공간은 ‘어른판’ 칠교놀이의 장이었다. 이곳에 설치된 작품 18점은 일정한 규격과 도형으로 촘촘하게 구성돼 있다. 관람객들은 그의 작품을 구기고 비틀며 다양한 형태를 시도했다. 폴랑의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그의 공간을 마련한 루이비통 측은 전시의 명칭을 ‘형태의 유희(Playing with shapes)’라고 붙였다.

공개된 18점은 폴랑이 가구 회사 허먼 밀러(Herman Miller)를 위해 1972년에 고안한 스케치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당시에 완성되지 못했으니 사실상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본 프로젝트다. ‘라 마케트(La Maquette·모형)’ 에디션으로도 불린다. 생전 고인이 해내지 못한 것을 루이비통이 해낸 것으로, 지난해 ‘물가 위의 집(The house by the water)’을 구현한 ‘페리앙 프로젝트’에 이은 또다른 성과다.

이날 전시장으로부터 6km 떨어진 디자인 마이애미 오프닝 행사장에선 디자인 마이애미의 수석 디렉터 로드먼 프리멕이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루이비통이 여지껏 그 누구도 해온 적이 없던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을 열었다. 모두들 부디, 꼭 한 번 가보기를 권한다.”

그 새로운 플랫폼 현장을 중앙SUNDAY S매거진이 다녀왔다.

2일 루이비통 VIP 파티에 참석한 미란다 커. 사진 BFA Agency

폴랑 디자인의 본질 “사람에게 편안해야 한다”
연한 회갈색 카펫이 깔린 전시장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다. 전시장 입구에 일렬로 늘어선 구두에는 저마다의 이름과 마크가 박혀있었다. 맨발이 된 사람들은 전시된 가구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웨이드 소파에 혹여 흠집이라도 생길까, 붉고 둥근 소파에 자칫 손때를 묻히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 같은 우려는 금세 허물어졌다. 피에르 폴랑의 가족들이 먼저 맨발로 그의 카펫(Tapis-siege) 작품 위에 올라섰고, 소파에 앉았다. 사람들은 하나 둘 카펫을 접어도 보고, 의자를 손으로 꾹꾹 눌러보기도 했다. 낯선 집에 초대받아 조심스럽게 적응하듯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천천히 즐기기 시작했다.

오후에 인근에서 치러진 루이비통 VIP 파티에서도 폴랑의 작품은 어김없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파티가 열린 ‘주얼 박스(Jewel Box)’ 건물은 이름 그대로 보석처럼 빛나는 네모난 박스 모양의 빌딩이었다. 이 입구에 주최측은 피에르 폴랑의 베이지색 스웨이드 모듈을 설치하고 붉은 불빛을 비췄다. 미란다 커는 소파 위에 앉아 각선미를 뽐냈고, 케이트 허드슨, 미셸 윌리암스 등 여러 셀러브리티가 번갈아가며 포즈를 취했다. 그야말로 가구계의 ‘보석’이 됐다.

피에르 폴랑의 디자인은 우리에게도 비교적 익숙하다. 오른쪽 팔목부터 왼쪽 팔목까지 둥글게 감싸 마치 꽃잎 위에 앉은 듯한 느낌을 주는 튤립 의자, 왕관 모양으로 봉긋하게 솟은 소파, 호박의 둥근 질감을 살린 펌킨 체어 등 어디선가 봤을 법한 디자인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프랑스 엘리제궁 아파트와 조르주 퐁피두의 아파트 리노베이션 작업도 폴랑이 도맡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폴랑은 생전 “사람들은 디자이너로부터 실용적인 오브제를 기대한다. 동시에 최대한 시적이고 우아한 것도 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아름다움과 실용성이 두루 갖춰져야 가구 디자인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파격적이고 화려한 색채와 디자인, 그러면서도 몸에 착 붙는 편안한 가구. 폴랑의 작품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식됐다.

폴랑은 소재도 자유롭게 선택했다. 왼쪽의 라운지용 소파(Petite Déclive, 1970)는 부드러운 스웨이드 재질로 제작됐고, 가운데 책장은 나무로, 우측 흰색 테이블은 변형된 플라스틱 소재가 쓰였다.
폴랑이 처음 ‘라 마케트(La Maquette)’ 시리즈를 구상하던 당시의 모형. Level 5. 사진 Archives Pierre Paulin

정사각형 쪼개 만든 상상력의 세계
이번 전시에서 공개된 작품들은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폴랑의 가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폴랑이 1972년 허먼 밀러와 함께 기획했던 ‘라 마케트(La Maquette)’ 시리즈의 스케치와 도안을 토대로 한 것인데, 색채도 은은하고 차분했다. 이에 대해 아들 벤자민 폴랑은 “기존의 색채가 아닌 보다 차분하고 귀족적인 색채를 활용해 기존 인식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프로젝트를 완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종의 고정관념을 깨는 전시가 기획된 셈이다.

이번에 공개된 그의 작품은 아름다운 동시에 실용적이었다. 사용자로 하여금 ‘어떻게 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던져줬다. U자 모양의 플라스틱 모듈은 켜켜이 쌓여 하나의 책장으로 구현됐다. 만일 뒤가 막혀 있었다면 이 책장은 벽에 붙어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 하지만 책장 너머로 반대편이 보이도록 설계됐다 보니, 이 책장은 하나의 공간을 둘로 나눌 수 있는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다. 단지 책을 꽂는다는 용도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이 놓이는 공간에 대해서도 또다른 기능을 한 것이다.

아예 어떤 역할을 할지, 그 기능을 온전히 사용자의 손에 맡긴 작품도 있다. 정사각형의 패턴에 대각선을 그어서 펴고 접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든 카펫이다. 반 뼘 정도의 두툼한 소재로 구성된 이 카펫은 침대로도, 소파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모든 면을 접어 하나의 독립된 공간도 만들어낼 수 있고, 모든 모서리를 전부 바깥쪽으로 개방해 카펫으로 쓸 수도 있다.

디자이너는 관람객에게 패턴을 줬고, 관람객은 그 모형을 가지고 놀았다. 부인인 마이아 폴랑은 “피에르는 실용적이면서도 인체공학적인 측면까지 고려한 기발한 디자인을 사랑했다”며 “어떻게 하면 요소들을 더욱 단순화할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욱 다양하게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 그는 늘 매혹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얼마 전 루이비통이 했던 ‘모노그램 재해석 프로젝트’도 떠올리게 했다. 루이비통이 칼 라거펠트와 프랭크 게리, 신디 셔먼 등 아트·디자인계 거장 6인에게 오직 LV마크가 새겨진 갈색 가죽의 모노그램을 던져주고 마음껏 변형토록 한 작업이다. 그 결과 루이비통의 ‘3초백’은 거대한 트렁크(신디 셔먼)가 됐고, 큼지막한 구멍이 뚫린 숄더백(레이 카와쿠보)으로 재탄생 했으며, 화려한 색감의 양털을 덮어쓴 백팩(마크 뉴슨)으로 변형됐다. 루이비통은 아티스트들이 마음껏 작업할 수 있도록 그들 고유의 패턴을 고스란히 내줬다.

40년 전 폴랑이 구상했던 라 마케트 시리즈 가운데 5층 전경을 실물로 구현한 모습.

작가가 생전에 못 끝낸 프로젝트… 루이비통이 완성
‘라 마케트’ 시리즈는 1970년대 초반 당시 석유파동의 여파로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고 했다. 사후에야 그의 작업이 루이비통과 함께 온전히 완성된 셈이다.

피에르 폴랑이 생전 하지 못했던 프로젝트를 루이비통이 완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지난해 루이비통은 ‘페리앙(Perriand)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1934년 프랑스 건축가 샤를로트 페리앙이 디자인한 집을 그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완벽하게 복원해낸 것이다. 푸른 지붕과 나무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물가 위의 집’이었다. 이 프로젝트 또한 2013 디자인 마이애미 기간에 사우스 비치에 전시됐다.

처음 루이비통으로부터 피에르 폴랑의 가구 프로젝트를 완성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마이아 폴랑 또한 페리앙 프로젝트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의 입장에선 루이비통 측의 아이디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마이아 폴랑은 “피에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니콜라 제스키에르(루이비통 수석 디자이너)와 다같이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며 “당시 피에르가 니콜라의 소재에 대한 감각과 프로젝트에 대한 애정을 인정했으리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2014년 12월, 10주년을 맞은 디자인 마이애미에서 이 프로젝트를 공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루이비통이 피에르 폴랑을 점찍은 이유에 대해, 루이비통 측은 “폴랑의 예술 철학을 들여다보면, 실용성과 우아함 사이의 완벽한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 그 부분은 우리와도 꽤 닮아있다”고 설명했다. 당장이라도 짐을 꾸려 떠날 수 있도록 마련된 루이비통의 여러 트렁크(Trunk) 컬렉션과, 여러 기능으로 쓸 수 있게끔 가구의 형태를 완전히 틀어버린 폴랑의 작품 사이에 매우 흡사한 철학적 코드가 있다는 것이다. 루이비통 측은 이를 “현대적 형태의 ‘노마디즘(Nomadism)’에 맞도록 대담하게 형태와 기능을 변형하는 시도”라고 정의했다.

마이애미(미국) 글 유재연 기자 queen@joongang.co.kr, 사진 루이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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