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양복 안주머니에 실종자 사진 9장 "아직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습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2014년 세상을 뒤흔든 최대 사건은 세월호 침몰 사고다. 4월 16일 오전 전남 진도군 조도면 인근 해상에서 발생한 사고로 승객 476명 중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된 전대미문의 참사였다. 이 와중에 단연 뉴스의 인물로 떠오른 사람은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이다. 장관 취임(3월 6일) 40일 만에 세월호 사고와 맞닥뜨린 이후 8개월째 사건 수습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사고 이후 한 번도 자르지 않아 귀밑으로 길게 늘어진 장발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동안 언론 인터뷰를 사양해온 이 장관을 만난 건 지난 9일 오후. 마침 해운법·선박안전법 개정안 등 세월호 후속 법안들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직후였다. 연안여객선의 안전관리를 강화하고 인명사고를 낸 사업자에 대한 영구 퇴출제도를 도입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개정안들은 이 장관의 손을 거쳐 국회를 통과하게 됐다. 본회의를 마치고 국회 문을 나서는 이 장관의 뒤를 쫓아 해수부 서울 사무소를 찾았다. 인터뷰를 거절하던 이 장관은 계속되는 기자의 요청에 “차 한잔 마시고 가라”며 문을 열었다.

이주영 장관은 “세월호 수색 중단은 유가족들의 대승적 결정에 의해 이뤄졌다”며 “어려운 결단을 내린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오종택 기자]

 - 이젠 이발을 해도 되지 않을까요.

 “너무 큰 사고여서 충격이 크니까 장관이 직접 수습을 하는 게 옳겠다고 판단해 (진도에) 내려갔는데 경황도 없고 해양수산부의 책임이 큰 사고였으니까 죄스럽기도 하고 해서 수염도, 머리도 그대로 두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죠. 8월 중순 국제회의에 참석해야 할 일이 생겨서 그때 면도는 했지만 머리는 계속 놔두고 있어요. 이건 실종자 가족들과 소통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죠. 실종자를 마지막 한 명까지 다 찾아주겠다고 가족들한테 약속했거든요.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의미죠.”

 - 실종자 가족들과 같이 생활하다시피 해 ‘팽목항 지킴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요.

 “4월 16일부터 꼼짝 안 하고 현지에 있다가 처음 외부로 나온 게 8월 20일께예요. 그전까진 진도군청 사무실에 간이침대 놓고 거처로 삼아 가족들이 있는 체육관과 팽목항에 매일 들렀죠. 가족들한테 수색상황을 브리핑하고 범정부대책본부장으로서 유실방지, 잠수사 안전관리, 잠수 수색 장비와 기술지원 등 3개의 TF 회의를 챙겼죠.”

 - 초반엔 봉변도 많이 당했는데 그땐 어떤 심정이었나요.

 “보통 욕이었죠. ‘장관놈 새끼’지. 허리띠 잡히고 옷가지 붙잡히고 ‘바다에 빠뜨려 죽여라’ 같은 분노의 감정이 섞인 표현들이었어요. 하지만 당연한 거죠. 누구든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나면 맘에 평정을 잃고 특히 어처구니없는 사고였기 때문에 정부에 대해 감정이 높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욕설 듣는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피해선 안 된다고 맘먹었죠. 대책회의 하는데 가족들이 항의하러 대거 몰려온다고 하면 참모들은 자기들이 맞을 테니 ‘장관님 피해 있다가 오시라’고 건의했지만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했어요. 내가 대책본부장인데 피하고 도망가선 해결이 안 된다. 또 장관 찾아내라는 걸로 시비가 붙는다. 그러니 다소간 봉변을 당한다고 해도 다 들어줘야 한다. 수렴하는 자세를 취하라고 했죠.”

  - 가족들이 언제 마음의 문을 열게 됐나요.

 “4월 24일 다이빙벨 투입 문제가 나왔어요. 가족들 중에서도 소용 없는 장비란 분이 상당수 있었고 다른 한편에선 모든 장비를 최대한 동원해야 한다는 분들이 있어서 다이빙벨 투입과 수색계획을 논의하는 대화자리가 마련됐어요. 24일 오후 5시 넘어서부터 이튿날 오전 10시 넘어서까지 잠 한숨 안 자고 밤새 대화를 해서 다이빙벨을 투입하는 걸로 결정을 내렸죠. 그날 가족캠프에서 밤새 대화를 하면서 실종된 아이들 얘기를 하게 됐어요. 부모들이 돌아가면서 ‘우리 아이는 공부 잘하고 효도하는 아이였어요’ ‘우리 아인 성품이 좋은 아이였어요’ 하면서 심정을 토로하는데 그때 처음으로 ‘장관님은 자제가 어떻게 되세요?’라면서 ‘장관님’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오붓하게 대화가 됐죠. 그때 가족들이 장관이 도망가거나 피할 사람은 아니다고 생각하게 된 거 같아요. 적극적으로 얘기를 들어준다는 데 대해 신뢰가 생겼다고 할까요. 아침 9시에 가족 대책회의가 열리는데 어떤 분이 ‘이제 장관을 보내줍시다. 우리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니까 이제 장관이 일을 하게 해줍시다’는 제안을 했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더군요. 그때부터 군청으로 가서 일을 보게 됐죠.”

 다이빙벨은 세월호 수색 과정에서 논쟁이 됐던 장비다. 당시에도 투입 여부에 대해 논란이 일었고 최근엔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 벨’이 개봉되면서 사고 초기에 당국의 방해로 다이빙벨이 바로 투입되지 못했다는 의혹을 둘러싸고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 현장에서 사고 수습 전 과정을 지휘한 입장에서 영화 ‘다이빙벨’ 속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보십니까.

 “처음엔 해군과 해경의 전문가들이 다이빙벨이 조류가 강한 곳에선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 투입에 반대했죠. 그러나 이상호(영화 ‘다이빙벨’ 제작자)씨와 일부 가족이 강하게 투입을 요구해 왔어요. 다이빙벨은 조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장시간 구조활동을 할 수 있는 장비라고 주장하면서 고의로 투입을 방해한다고 공격했어요. 언딘과의 유착관계란 얘기도 하고. 제가 판단할 때 이건 투입을 해서 효과가 있는 장비인지 아닌지 실증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해서 투입하기로 한 거죠. 하지만 역시 효과가 없다는 게 입증이 됐죠.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음모론 같은 얘기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전연 없었어요. 다 오픈돼서 많은 사람이 관여하고 있는데 만약 방해했다면 그게 다 드러나지 은폐될 수가 없어요. 또 그런 상황에서 누가 일부러 그렇게 방해해 좋을 일이 뭐가 있어요.”

 - 심리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가장 의지가 된 건 누구였습니까.

 “제가 가톨릭 신자니까 의지가 된 건 있죠. 나중엔 오히려 실종자 가족들이 더 힘이 되더라고요. 가족들이 나서서 나를 보호해줬어요. 국회에서 상임위 열어 구조상황 보고하라고 요청이 왔을 때 가족들이 나서 ‘장관님 가면 곤욕만 치르니 가면 안 된다. 우리가 못 가게 하겠다’고 해서 상임위 보고는 안 갔어요. 장관이 진정성 있게 힘을 써주니까 우리가 보호해야 된다는 유대감 같은 게 생긴 걸 많이 느꼈죠.”

 - 세월호 사고는 우리 사회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인데 특히 충격을 느낀 건 언제였습니까.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들을 먼저 구출하려는 자세가 안 되고 자신들이 먼저 살려고 나왔다는 걸 보고 충격이 너무 컸어요. 선원들의 시맨십 교육이나 윤리의식도 해수부의 책임이니 저희의 책임이 크죠. 해수부 책임자로서 통렬한 책임을 느낍니다.”

 - 선체 인양문제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수중 수색은 종료됐고 또 하나의 수색 방법은 인양 수색인데 이건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만 6000t이 넘는 큰 배이고 화물이 많이 실려 있어 중량이 많이 나가는 선체인 데다 수심이 깊고 조류가 센 해역이어서 기술적으로 인양이 가능한지 여부를 먼저 검토해야 합니다. 해군, 해경, 선박·인양 전문가 등으로 TF가 구성돼 활동 중인데 내년 2월께 보고서가 나옵니다. 이걸 토대로 전문가와 실종자 가족들의 의견을 듣고 국민적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청해진이 인양 비용을 부담할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국민 세금으로 인양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국민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 사의 표명을 했지만 일각에선 계속 장관직을 수행하길 바라는 여론도 있습니다.

 “실종자 가족들 입장에선 9명을 찾아야 되는 문제가 남아 있으니까 장관이 좀 끝까지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을 수 있죠. 그러나 세월호 침몰은 해수부의 책임이 큰 사고였고 그로 인해 가족뿐 아니라 국민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줬기 때문에 법적 책임이 됐건 정치적·도의적 책임이 됐건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게 도리입니다.”

 부산지법 부장판사를 지낸 4선 의원(창원 마산- 합포)인 이 장관의 향후 거취와 관련해선 원내대표 출마설이 새누리당 주변에서 나오고 있다. 원내대표에 출마할 것이냐는 질문에 이 장관은 “노 코멘트”라며 답을 피했다. 대신 양복 안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기자에게 보여줬다. 아직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실종자 사진 9장이 비닐 코팅돼 있었다. 그에게 있어 세월호는 ‘현재 진행형’이다.

글=이정민 정치·국제 에디터 jmlee@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