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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 제작에 평생 바친 형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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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6형제 바둑’의 여섯 형제들이 바둑판 덮개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신완식(첫째)·우식(여섯째)·병식(셋째)·추식(다섯째)·춘식(넷째)·명식(둘째)씨. [신인섭 기자]

신완식(63)씨는 유난히 팔과 어깨가 튼튼하다. 환갑을 넘겼지만 팔씨름에서 져본 일이 거의 없다. 바둑판을 만드느라 50년째 대패질로 단련된 덕분이다. ‘바둑판 제작의 달인’으로 통하는 신씨는 초등학교 졸업 이듬해인 14세부터 대패와 씨름했다. 이젠 눈을 감고도 종잇장보다 얇으면서도 균일하게 대패질을 할 수 있을 정도다.

 다리도 운동선수 못잖다. 청년 시절부터 100㎏이 넘는 바둑판 짐을 자전거에 싣고 다닌 결과다. 서울에서 수원·인천 등지로 6~7시간 거리를 하루가 멀다 하고 다녔다. 힘든 일을 견뎌내기 위해 태권도와 합기도로 체력을 길렀다.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외길 인생은 결실을 맺었다. 반평생 노력으로 현재 한국 바둑판 제작업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회사의 대표가 됐다. 성공에는 끈끈한 형제애도 한몫했다. 남동생 다섯 명과 함께 바둑판을 제작하고 있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6형제 바둑’이다.

 빈농 가정에서 자란 신씨는 1964년 상경하면서 바둑판과 인연을 맺었다. 친척의 동서인 고(故) 조남철 국수의 소개로 명동 송원기원에서 일을 보게 됐다. 이듬해에는 목공 전문가 친척이 운영하는 공장에 취직해 본격적으로 바둑판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침 월남에 간 장병에게 바둑판과 장기판을 대량으로 보내게 되면서 일감이 쏟아졌다. 그는 여기서 11년간 기술을 익힌 뒤 76년 서울 금오동에 33㎡ 규모의 공간을 얻어 바둑판을 직접 생산·판매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발전을 거듭했다. 38년이 흐른 지금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의 5000㎡ 부지에 대규모 공장을 운영 중이다. 문방구에 바둑판을 낱개로 팔던 조그만 공장이 연매출 15억원대의 어엿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신 대표는 “6형제가 한 우물을 파며 의기투합한 게 성공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6형제는 모두 한 동네에 산다. 부인들도 전원 회사에 나와 일한다.

 신 대표의 세 아들도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영어·중국어·일어에 능통해 수출 업무에 큰 보탬에 되고 있다. 신 대표는 “주문 물량이 넘칠 때면 직원들이 꺼리는 야간근무를 가족들이 도맡아 하곤 한다”며 가족 경영의 이점을 소개했다. 신씨 형제는 각자의 소질에 따라 원목 구매부터 바둑판 줄 긋기와 대패질·수출·판매·관리 등의 업무를 나눠 맡고 있다. 다섯째인 신추식(53) 본부장은 “서로 잘해 보려다 가끔 다툼이 일기도 하지만 이럴 땐 부인들이 나서 곧바로 화해시키는 게 우리 가족의 힘”이라고 귀띔했다.

왼쪽부터 거북이 모양으로 만든 바둑판, 아이들을 위해 개발한 컬러 바둑알, 바둑을 두면 얻게 되는 다섯 가지 이로움을 적어놓은 고급 바둑판의 덮개.

 고비도 적잖았다. 88년엔 서울 신내동 배밭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마련한 대량 생산시설이 화마로 잿더미가 됐다. 하지만 전국의 거래처에서 “빨리 재기하라”며 미수금 4000여만원을 일제히 돌려줘 위기를 넘겼다. 98년 여름엔 물난리로 공장이 쑥대밭으로 변했지만 6형제와 온 가족이 밤낮없이 매달리고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복구자금을 마련해 1년 만에 원상복구시킬 수 있었다.

 실패도 보약이 됐다. 78년 미국으로 처음 바둑판을 수출할 때부터 사달이 났다. 선박편에 실어 보낸 바둑판의 줄이 모두 지워져 있는 황당한 사고를 당했다. 당연히 전부 변상해야 했다. 이렇게 주저앉을 순 없었다. 곧바로 기술 개발에 나섰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결국 줄이 지워지지 않으면서 변형되지도 않는 바둑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신기술 특허까지 마쳤다. 현재 전체 생산량의 80%를 이 기술로 만든다. 덕분에 미국·브라질 등 50개국으로 수출시장도 넓어졌다.

 바둑알도 다양화했다. 플라스틱과 폐유리 등을 활용해 재질과 색상을 차별화했다. 바둑알 재료로 인기가 높은 대왕조개를 다량으로 구하기 위해 중국 현지에 생산공장을 차렸을 정도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흰색과 검은색 대신 갖가지 색깔의 컬러 알도 개발했다.

 최근엔 대한장기협회 의뢰를 받아 통일 장기판과 통일 장기알도 개발했다. 장기판 한가운데 푸른색의 한반도 지도를 그려 넣고 커다란 장기알에도 초(楚)·한(漢) 대신 통(統)·일(一) 자를 새겼다. 신 본부장은 “분단으로 남북의 문화가 이질적으로 변해 가는 상황에서 전통 놀이문화인 장기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했으면 싶다”고 말했다.

 바둑으로 이룬 성공을 바둑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서울 탑골공원 인근과 왕십리, 수원 정자동 등 세 곳에 ‘6형제 바둑문화센터’를 개설해 바둑 보급 활동을 벌이고 있다. 프로 바둑기사와 대학교수를 초청해 바둑 강좌도 연다. 셋째인 신병식(59) 감사는 “바둑 덕분에 남다른 형제애로 뭉칠 수 있었다. 바둑은 우리 6형제가 평생을 함께한 일곱째 동생과도 같은 존재”라며 웃었다.

남양주=전익진 기자 ijjeon@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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