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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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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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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석 달 전이었습니다.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혹시 이현주 목사님 전화번호 알아?” 신문사 선배였습니다. 이 목사는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좇는 수도자이자 시인입니다. 수소문했습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시골 목회를 하는 고진하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고 목사도 시인이라 통할 것 같았거든요. “이 목사는 휴대전화 없어. 집 전화번호가 있는데 전화해도 안 받을걸. 산에다 움막을 짓고 살거든. 거긴 전화도 없어. 가끔 산에서 내려오면 우리 집에 들르긴 해.” ‘043’으로 시작하는 집 전화번호를 선배에게 알려줬습니다. 그러고는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저께였습니다. 그 선배가 노래를 하나 들려주더군요. 노래꾼 장사익의 새 앨범에 담긴 곡이었습니다. 제목은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그때 일러준 전화번호가 이 노래가 나오는 데 일조했다.” 알고 보니 장사익 선생이 이 목사의 시에다 노래를 입히려고 연락처를 수소문한 것이었습니다. 가까스로 이 목사의 딸이 전화를 받는 바람에 연락이 닿았다고 했습니다.

 노래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더군요. 왜냐고요? 우리의 삶에도 숱한 만남이 있습니다. 다들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만나 무엇을 얻을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만남을 통해 무언가 얻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채워지고, 강해지고, 부유해지기를 꿈꿉니다. 그래야 생산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의 시는 거꾸로입니다.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눈을 감았습니다.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건 노래가 아니더군요. 차라리 물음이었습니다. 깊은 묵상에서 길어올린 예리한 시선이 장사익 선생의 절절한 목청을 타고 날아왔습니다. 노래는 이렇게 묻더군요. ‘당신은 만남을 통해 무엇을 버리는가.’ 이 목사는 그런 만남을 강물에 빗댔습니다.

 ‘바다 그리워 깊은 바다 그리워/ 남한강은 남에서 흐르고 북한강은 북에서 흐르다/ 흐르다가 두물머리 너른들에서/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 아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한강 되어 흐르네/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남북한 이야기뿐이 아닙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너와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남한강은 남을 버리면 자신을 잃을까 봐 겁을 냅니다. 북한강은 북을 버리면 더 이상 강이 아닐까 봐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상대방 앞에서 나의 고집을 버릴 때도 똑같습니다. 더 이상 내가 아닐까봐, 나의 중심이 사라질까 봐 겁이 납니다. 그래서 쉽사리 자신을 꺾지 못합니다.

 그런데 강물이 보여줍니다. 남한강이 남을 버리고, 북한강이 북을 버릴 때 우리는 ‘한강’이 된다고. 하나의 강, 커다란 강이 된다고 말입니다. 얻음이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바다로 흘러간다고 일러줍니다.

 곰곰이 짚어봅니다. 서로 다른 두 강줄기가 만났습니다. 자신을 버릴 때 그들은 왜 하나가 될까요.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강’이 되는 걸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를 버릴 때 상대방 속으로 녹아들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나를 버릴 때 비로소 상대방이 내 속으로 녹아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큰 강이 됩니다.

 그걸 알면 두렵지 않습니다. 나의 중심을 버린다고 중심이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더 큰 중심이 생겨납니다. 남한강만 움직이던 중심축이 한강의 중심축으로, 나중에는 오대양까지 움직이는 중심축으로 확장됩니다. 다시 재생 버튼을 눌러 봅니다. 노랫말이 날아와 가슴에 꽂힙니다. 첫 소절부터 바다가 그립다고, 푸른 바다가 그립다고 노래합니다. 그곳에 닿는 방법은 참 명쾌합니다.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