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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중 270일 감사 받는 은행 … "누가 과감한 투자 하겠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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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기업에 왜 대출을 안 해 주느냐고? 올 들어 감사원·금융감독원·예금보험공사·한국은행, 여기다 국회까지 감사나 검사를 받은 날이 줄잡아 270일이다. 휴일 빼곤 연중 감사나 검사를 받은 셈이다. 대출해 줬다 부실해지기라도 하면 징계는 물론이고 국회에까지 불려 나가 곤욕을 치러야 한다. 이런 마당에 어떤 은행원이 기업의 미래를 보고 선뜻 대출을 내주겠나. 털끝만큼이라도 나중에 문제될 소지가 있는 대출은 피하고 보는 거지.”

 한 시중은행 관계자의 푸념이다. 기업만 그런 게 아니다. 연봉 2500만원을 받는 직장인 최모(34)씨는 최근 생활자금 대출을 받으려고 은행 문을 두드렸다. 신용등급 6등급인 그에게 돈을 빌려 주려는 시중은행은 없었다. “대출 금리를 좀 높이더라도 돈을 빌릴 수 없겠느냐”는 호소에도 “규정상 안 된다”는 답만 되돌아왔다. 급한 마음에 찾은 저축은행에선 금리 21%짜리 대출상품을 들이밀었다. 최씨는 “은행이 상대하는 신용등급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대출 금리가 10%포인트 이상 뛴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금융회사의 횡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달리 주택담보대출은 갈수록 큰 폭으로 늘고 있다. 올 4월부터 9월까지 매달 2조~4조원 정도 늘던 은행 주택담보대출은 10월과 11월에 각각 6조원 가까이 급증했다. 정부가 주택담보인정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완화하고 한은이 금리를 낮추자 주택담보대출이란 손쉬운 영업에만 몰두했다. 쏠림현상은 나중에 금리가 인상될 때 부실 대출을 양산해 은행권 전체를 뿌리째 흔들 수 있다. 천수답 영업에만 치중하다 실질금리 마이너스 시대를 맞으니 수익성이 떨어진 건 당연하다.

 한국씨티은행의 지난해 총자산순이익률(ROA)은 0.39%였다. 수익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이 지표는 씨티그룹이 진출한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 은행은 연초 대규모 인원 구조조정에 이어 캐피털업 철수를 결정했다. 박진회 행장은 “한국 금융산업의 수익성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선 조직을 슬림하게 가져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2000년대 들어 정권마다 한국을 ‘아시아 금융허브’로 만들겠다고 공언했지만 현주소는 초라하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총자산순이익률은 올해 3분기 0.33%로 떨어졌다. 100만원 자산을 가지고 3300원 수익밖에 못 낸다는 의미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대로 회복됐다 최근 들어 급격히 떨어졌다. ‘잃어버린 20년’ 여파로 침체를 겪고 있는 일본(0.3%) 수준으로 고꾸라졌다. 보험연구원 전용식 연구위원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은행의 덩치도 커졌고 보험사의 자산도 증가했지만 하드웨어에 걸맞은 소프트웨어는 갖추지 못했다. 금융시장의 자생력이 사라졌다”고 비판했다.

 그런데도 다양한 금융상품을 개발하고 새로운 수익원을 찾으려는 노력은 여전히 뒷전이다. 예금 금리는 낮게, 대출 금리는 높게 가져가며 차익으로 돈을 버는 예대 마진 위주의 영업 관행은 더 심해졌다. WB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전체 수익에서 이자 수익이 차지하는 비중은 올 3분기 기준 82.2%나 된다. 금융 선진국 프랑스(38.2%)·독일(41.6%)·홍콩(49.9%)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이는 은행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산운용사로 새로 흘러간 자금은 올 10월 21조8000억원이었다가 11월 2조9000억원으로 급감했다. 증권사를 비롯한 자산운용업과 생명보험, 상호금융조합, 신용카드 부문도 수익 감소에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새 먹거리를 찾기는커녕 앉아서 고사하는 형국이다. 한국금융연구원 손상호 선임연구위원은 “진입과 퇴출이 동시에 어려워지면서 ‘대마불사(大馬不死·큰 말은 죽지 않음)’ 구도가 기형적으로 자리 잡았다”며 “자생력이 없다 보니 은행은 예대 마진, 자산운용시장은 거래수수료와 위탁매매에 의존하는 구조가 고착화됐다”고 지적했다.

 금융 개혁이 지연되는 사이 정보기술(IT)을 무기로 한 외부의 도전은 거세지고 있다. 인하대 김대호(정보기술산업정책학) 교수는 “외부 충격이 금융 개혁을 가져올 수밖에 없고 벌써 금융과 IT가 결합한 ‘핀테크(FinTech)’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며 “해외에선 새로운 기회가 정체된 한국 금융에는 위기의 형태로 다가오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조현숙·심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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