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능이 치러진 지난달 13일 한 온라인 사이트에 흥미로운 동영상(‘미국인이 수능 어려운 영어 문제 풀기’)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한국 문화를 재치 있게 동영상으로 제작해 온 미국인 여성 휘트니가 수능 영어 32번 문제를 직접 풀어 보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휘트니는 지문을 읽어 내려가다 여러 대목에서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 어렵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미국 사람인데도 (영어 문제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 3점짜리 문제가 아니라 30점이나 300점짜리여야 한다”며 의아해했습니다.
휘트니가 풀어본 영어 지문을 한글로 번역해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일부분만 발췌해 봤습니다. ‘이해에 있어서의 진보가 세계의 사회적인 불행을 치유하지 못해 왔다는 것에 실망하는 것은 타당한 견해지만, 이것을 지식의 진보와 혼동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한국어 논문에서도 등장할 것 같지 않은 내용을 영어로 써 놓으니 원어민도 황당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능이 끝난 뒤 해당 문제의 지문 중 일부 문장은 문법적 오류가 있다는 지적까지 받았습니다.
휘트니는 이 문제를 5분 동안 고민하다 결국 오답을 고릅니다. 하지만 올해 수능 영어는 만점자가 3.37%로, 역대 수능 사상 가장 많이 나왔습니다. 원어민도 못 푸는 문제가 있는데도 ‘물수능’이라고 평가받으니 어찌 된 일일까요. 그 이유는 수능 영어의 EBS 교재 연계율이 75.6%나 된다는 데 있습니다. 32번 지문도 EBS 수능 완성 실전편 3회 41번 지문에서 거의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휘트니는 한국의 대입 수험생들이 EBS 지문 외우기에 열중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겁니다.
EBS 수능 교재를 몇 차례 독파하면 한글로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를 수능 영어 문제를 단 몇 초 만에 풀 수 있다는 수험생도 많습니다. 유명한 수험생 카페에는 “EBS 교재를 여러 번 봤더니 연계 지문들은 3초 만에 풀었다” “EBS 교재를 8회 독파했는데 그래프가 없는 연계 지문은 1초 만에 내용을 파악했고, 다소 어려운 문제들에 30분 이상 투자할 수 있었다”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쉬운 수능 영어’를 표방한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EBS 지문을 거의 변형 없이 수능에 출제하면서 지문의 주제나 제목, 내용 일치 여부 등을 주로 묻기 때문에 지문에만 익숙해지면 문제 풀이는 식은 죽 먹기라는 겁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어 학습은 왜곡되고 있습니다. 원어민도 이해 못할 내용을 영어로 공부하는 것도 이상한데, 지문 내용만 알면 정답을 맞힐 수 있으니 바쁜 수험생들은 한글 번역본부터 외우고 단어만 공부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일선 교사들에 따르면 EBS 영어 지문의 첫 문장과 중심 문장을 수록하고 한글 해석을 달아 수능에서 지문을 보자마자 기억나도록 해 준다는 책이 팔리고 있습니다. EBS 교재를 한글로 공부하는 요령을 알려 주는 인터넷 강의도 있다고 합니다. 2018학년도부터 영어 절대평가가 시행됩니다. 수능 영어를 계속 쉽게 내겠다는 교육 당국은 ‘EBS 영어 지문 외우기’에 빠져 버린 국내 영어교육을 되살릴 대책을 시급히 내놓아야 합니다.
김성탁 교육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