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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닥치고 의대' 그리고 20년 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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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대구 경신고에서 수능 만점자 네 명이 나왔다. 재학생 기준으로 전국 최다 기록이다. 이 학교 만점 입시생 네 명은 모두 의대로 진학하겠다고 밝혔다. 중앙일보가 수능 수석들의 진로를 추적해보니 2000학년도 이후 이과 수석 16명 중 13명이 의대·치대에 입학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한 명은 서울대 이공계를 선택했지만, 수능을 다시 치르고 결국 서울대 의대로 갔다(12월 3일자).

 요즘 공부 좀 하는 학생들은 대개 이과에서는 의대, 문과에서는 경영대로 간다. 의대의 압도적 인기는 1990년대 말 경제 위기 이후 확고해졌다. 경영대는 법학전문대학원 도입 이후 법대가 사라지면서 독주 체제를 굳혔다.

 의대 쏠림은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전국 의대 총 정원이 1600여 명에서 2300여 명으로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입시학원에서 내놓은 예상 정시모집 커트라인을 보니 지방 의대 대부분이 서울대 이공계 학과들보다 점수가 높다. 고득점자들이 서울대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로 가던 시절의 얘기는 어느덧 전설이 됐다.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나라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다른 나라에서도 의사는 선망의 직종이지만 최우등생들이 의대로 몰리지는 않는다. 미국 대학의 학부에는 의대가 없으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고,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국에서는 학부에 의대가 있고 인기도 높지만 우리처럼 우수 학생이 집중되지는 않는다. 전교 1, 2등이 물리학과·수학과·화학과로 가는 경우가 흔하다.

 경영대 사정은 더 특이하다. 미국 아이비리그 8개 학교 중 학부에 경영학과가 있는 곳은 펜실베이니아대뿐이다. 영국에서 경영학과는 경제학과나 역사학과에 비해 지원자에게 요구하는 점수가 낮다. 영·미권 명문대에서 최우수 문과생의 증표는 ‘철학·정치·경제 통합(PPE)’ 전공이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의대·경영대로 가는 나라의 20년 뒤 미래는 어떨까.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잇따라 나오고 평균 수명 100세의 시대를 활짝 열까. 경영 기법의 획기적 발전으로 부국(富國)의 꿈을 이뤄낼까. 안타깝게도 이런 기대는 접어야 할 것 같다. 성적이 좋은 의대생들은 앞다퉈 성형외과·피부과·안과로 몰려간다. 그 사이에 기초의학 전공은 외면당하고 있다. 상당수 경영대생에게는 법학전문대학원 진학 준비가 ‘주전공’이 된 지 오래다. 외부 세계와는 동떨어진 이 ‘갈라파고스’적 고등교육의 진화, 매우 불길해 보인다.

이상언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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