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A 중견기업. 지금까지 자발적으로 퇴사한 직원이 한 명도 없었을 정도로 회사에 대한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그러나 요즘 이 회사 분위기는 싸늘하다. 2016년부터 정년 60세가 법으로 보장되기 때문이다. 현재도 이 회사 직원의 40%는 부장급이다. 해마다 임금이 자동으로 오르는 호봉제도 그대로다. 그런데 정년만 늘게 되자 고민에 빠졌다. 이 업체 관계자는 “매년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는 그대로 두고 정년만 연장하면 인건비 부담을 견디기 어렵다”며 “창사 이래 첫 명예퇴직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A사가 처한 현실은 최경환 경제팀 출범 후 정부와 한국은행이 돈 풀기에 나섰어도 약발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원인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현장 기업 입장에선 정부 재정지출 확대나 한은 금리 인하보다는 정년 60세 연장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정부가 경기부양에 나선들 직원을 늘리기는커녕 되레 감원을 해야 하는 이유다. 국내 노동시장은 아직도 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만들어진 연공서열형 임금체계에 갇혀 있다. 여기다 고령화에 따른 정년 연장까지 맞물렸다.
사람을 뽑는 데 대한 기업의 부담을 덜어 주자면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를 완화해야 한다. 그래야 비정규직 처우 개선도 가능해진다.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한국 경제는 더는 선진국을 따라가는 추격자 전략을 쓸 수 없고 이젠 선도자 전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를 창의력과 혁신을 촉진하는 성과·직무급형으로 바꿔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동시장 개혁은 쉽지 않다. 노사와 정부는 물론 기득권을 쥔 정규직 노동조합과 피해의식에 젖은 비정규직 사이에도 대타협이 이뤄져야 한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의 ‘아베노믹스’가 지지부진한 이유도 구조개혁이란 ‘세 번째 화살’을 쏘지 못하고 주저했기 때문이다. 구조개혁은 마치 우리 몸의 혈관을 깨끗하게 만들어 외부에서 주입된 영양이 온몸 곳곳에 퍼질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다. 구조개혁 없이 돈만 푸는 건 자칫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시간이 많지 않다. 내년 하반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 인상에 나서면 달러의 미국 환류에 한국과 같은 신흥국은 진퇴양난의 덫에 걸릴 수 있다. 그 전에 경기 회복의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다행히 내년 국내엔 큰 선거가 없다. 구조개혁엔 천우신조의 기회다.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20년’의 디플레이션 늪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 수 있다.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김기찬 선임기자, 세종=김원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