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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아무 걱정 없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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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호 27면

신부들에게는 일정한 봉직 기간이 채워지면 일 년간의 휴가기간, 이른바 ‘안식년’이 주어진다. 용어의 기원에 충실하려면 7년에 한 번씩 주어져야 하지만 현실적인 여건상 평생 딱 한 번 찾아먹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부분 그 금쪽같은 기간을 ‘안식’이라는 말 그대로 빈둥거리며 즐기지만 바지런한 이들은 연수 또는 여행으로 보내기도 한다.

저러한데, 며칠 전 신학교 시절부터 면식이 있던 대전교구 모 본당 주임신부로부터 안식일 체험담을 배꼽 잡으며 들었다. 그는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배낭 하나 덜렁 메고 세계 37개국을 돌았다고 한다. 그동안 비행기를 여섯 번 놓치고 죽을 고비를 네 번 넘겼다는 그. 그는 스페인 어느 깊은 산에서 길을 잃었던 경험을 생생하게 털어놨다.

“두려움유! 그건 낭만여유. ‘무섭다’는 느낌이 드는 거는유, 아직 살 만하다는 거예유. 허기지고 기운 떨어져 기진맥진 해 봐유. 느낌이구 생각이구도 없슈. 그냥 배낭 철퍼덕 내려놓고 내처 자고 싶은 거유. 산짐승유? 죽음유? 세상에 두려운 건 하나두 없슈. 기운이 바닥나면유, 다 받아들이게 되어 있는 거유!”

깨달음의 소리였다. 그렇지 않은가. 진짜로 기운이 소진되면 인간은 그저 잠들고 싶은 것이다. 아니, 저절로 잠에 몽롱하니 잠겨드는 것이다. 그 찰나에 무슨 욕심이며 두려움이 고개를 들겠는가. 그런 것들도 기운이 있어야 하는 노릇인데….

반가운 것은 그 신부가 그 깨달음의 사위지 않는 여운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자들이 일상에서 부대끼는 걱정거리들을 쏟아놓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해준단다.

“아무 걱정 없슈!”

듣는 이마다 홀린 듯이 ‘평화’를 한가득 얻어간다니 신통방통한 처방이 아닐 수 없다. 신자들이 이 말에 너무 공감한 나머지 신부는 이 말로 인해 되레 역풍을 맞을 정도란다. 어쩌다 신자들에게 각자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할 것을 종용이라도 할라치면 그들 입에서 반사적으로 저 말이 남용된다는 것이다.

“신부님, 아무 걱정 없슈!”

진한 사투리 말투라서 더 신뢰감 있게 들려 온 그 신부 이야기의 백미는 어머니 임종에 대한 회상이었다. 신부의 어머니는 몇 년 전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어머니에게는 원수처럼 미워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신부인 그는 어머니가 깨끗이 용서하고 생을 청산하길 원했기에 강력히 용서를 권하였다. 어머니는 심히 역정을 내셨다.

“신부님, 이제 와서 나한테 그 얘기를 왜 하는 겨. 지금 이 상황에 용서가 무슨 의미여….”

말은 그랬지만 신부는 분위기상 ‘어머니가 다 용서하시고 하느님 품으로 가셨다’고 믿었다. 그런데! 앞에 언급한 스페인 산중에서의 깨달음을 통해 지금은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용서하셨던 것이 아니에유. 죽음 앞에서는 미워하구 말구, 용서구 자시구두 없는 거유. 미움 자체가 허무한 거유. 그냥 다 털고 가는 거유.”

심오한 예지다. 무(無)에 직면한 인간, 절대 앞에 선 인간, 어쩌면 궁극의 실재 문턱에 선 인간이 무슨 희로애락에 집착하겠는가.

연말이다. 인간이 설정한 상대적인 끝! 이렇게 구획된 한 해의 마감을 우리는 각자 몇 번이나 더 치르면 절대적인 끝에 이르게 될 것인가. 100번? 50번? 25번? 10번? 아니면 한 번? 그때가 되면 ‘그냥 다 털고 갈 것’을, 기왕이면 상서로운 것만 실컷 누리고 해악스러운 것은 미리부터 내려놓음이 어떨까. 새해에는 아등바등할 일보다 웃을 일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차동엽 가톨릭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무지개 원리』 『뿌리 깊은 희망』 등의 저서를 통해 희망의 가치와 의미를 전파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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