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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할 수 없는 자연 그곳에 예술이 있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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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호 08면

2 울루루에서 30km 거리에 있는 36개의 거대 바위군 카타추타의 ‘바람의 계곡’. 역시 가장 깊숙한 곳에 물웅덩이가 있다.
1 울루루 동굴벽화는 2만년 전 그려졌다고 했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명했다.

예술과 패션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 2006년 개관한 케 브랑리 국립미술관(Musée du quai Branly). 세계인의 눈이 모이는 에펠탑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이 미술관의 지붕 전체를 덮고 있는 그림은 누구의 작품일까. 프랑스인일까, 미국인일까. 정답은 호주 원주민 예술의 거장 레나 나이야드비(Lena Nyadbi·78)다.

원시 호주로 간 디자이너 이상봉

세계 미술 시장에서 호주 원주민(Aborigine) 미술이 뜨고 있다. 5만년 전부터 호주 땅에 살아왔지만 18세기 이민자들이 상륙한 이후 이리저리 쫓겨다니며 최근까지 원시의 삶을 유지해 왔던 지구상 마지막 유목민. 이들이 오랫동안 모래 위나 동굴 벽에 막대기로 새기던 그림을 캔버스에 옮기자 놀랄 만큼 감각적인 현대미술로 재탄생했고, 원주민들은 예술가가 됐다.

이 가장 원시적인 사람들의 그림은 대체 어떤 마력을 갖고 있길래 세계 미술사 어느 맥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새로운 현대미술로 가치를 인정받게 된 걸까. 한국의 전통을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승화시키는데 앞장서온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이 그 비밀을 찾아 나섰다.

3 우엔두무 원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던 성소 ‘워터 드리밍 사이트’.
4 야렌티 알테레에서 인형을 만드는 멀린. 5 탕엔지에의 아티스트 마거릿. 6 왈라쿨랑가에서 만난 아이들.

세계 지도에서 호주를 찾으면 해안선에 둘러진 초록 띠를 따라 도시가 발달해 있다. 가운데 내륙은 온통 노란색으로 칠해진 사막이다. 그 노란색의 정중앙, 이름도 낯선 앨리스 스프링스의 데자트(Desart)가 디자이너 이상봉을 불렀다.

데자트는 중앙 호주에 산재한 40여 개 아트센터를 지원하는 NGO다. 아트센터는 현대 문명의 접근이 어려운 사막 원주민들이 자립해 살아가기 위한 삶의 터전이다. 과거 백호주의를 내세워 원주민을 탄압하던 호주 정부가 1960년대부터 그들이 호주의 진짜 주인임을 인정하면서 예술가의 지위를 부여하고 아트센터를 중심으로 정착을 유도해 왔다.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함께 예술가 교환 프로그램인 ‘노마딕 레지던시’를 진행하는 등 한국과 교류를 시작한 데자트가 이씨를 초청한 건 다양한 문화와 콜라보레이션 경험이 풍부한 그의 안목을 통해 원주민 전통 예술을 영향력 있는 디자인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다.

“전통적인 생활미술을 디자인과 접목하면 다양한 가치가 더해지죠. 저와의 만남이 원주민 전통의 현대화에 도움이 됐으면 해요. 패션은 물론 도자기나 한글 등 우리 것과 접목할 수도 있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요. 그러려면 제가 먼저 저들의 문화를 알아야겠죠.”

앨리스 스프링스에 도착하니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의 뜨거운 태양이 붉은 대지를 달구고 있었다. 마중나온 데자트 CEO 필립 왓킨스가 “이 도시엔 부족 개념의 타운캠프 17곳이 저마다 아트센터를 갖추고 있다”고 소개했다. 처음 찾아간 야렌티 알테레(Yarrenty Arltere) 아트센터는 낡은 담요 등을 이용해 인형을 만드는 곳. 7~8명의 여성들이 에뮤와 도마뱀 등 식량으로 삼는 동물과 스스로의 모습을 바느질로 짓고 있었다.

이씨가 “나도 바느질하는 사람”이라며 “바느질할 때 모든 근심 잊고 가장 순수해진다”고 하자 운영자 소피도 “이들이 바느질을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라고 맞장구친다. 그런데 이들의 작업은 다소 거칠고 단순한 느낌이었다. “바느질 솜씨를 보여주고 싶은데 내가 너무 잘하면 이 사람들이 실망하겠죠. 한국에 많은 스팽글, 비즈 등 다양한 소재를 더하면 어떨까요. 이 사람들도 더 재미있을 텐데 말이죠.”

마당에 나오니 캥거루 꼬리와 빵 등을 구워먹는다는 모닥불 터가 있었다. 가족이 이 마을의 리더라는 멀린이 다가와 오늘 저녁 남편을 위해서 구울 거라는 빵 반죽을 내밀면서 “당신들을 위해서도 하나 구우려 했는데 하도 안 와서 관뒀다”며 웃는다.

두 번째 방문지는 탕엔지에(Tangentyere) 아트센터. 10여 명의 원주민이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막대기에 아크릴 물감을 묻혀 점을 찍고 있다. 초등학생처럼 또박또박 집과 마을을 점으로만 그리는데, 이 점묘법이 원주민 미술의 시그니처다. 바닥에 주저앉아 가장 커다란 작업을 하는 마거릿에게 뭘 그리고 있느냐고 물으니 자기 집이란다. 다른 지역의 그림은 주로 추상적인 기호지만 이곳의 작가들은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게 운영자 조의 설명이다.

7 왈라쿨랑가의 아티스트들은 이상봉 디자이너의 손길을 환영했다. 8 왈라쿨랑가 아트센터에는 수 백 가지 색상의 아크릴 물감과 다양한 미술재료들이 구비돼 있다. 9 원주민들은 대부분 점으로 모든 면을 메우는 ‘도트 페인팅’ 기법을 구사한다.
10 마루쿠 아트센터 앞뜰에서 작업중인 아티스트들. 11, 12 최고의 원주민 목공예 아티스트 빌리 쿨리와 그의 부인 룰루가 함께 악기를 만들고 있다.

세상의 창조방식 ‘드리밍’
우엔두무(Yuendumu)는 앨리스 스프링스에서 다시 사막을 3시간 달려야 하는 오지 마을. 1000명 인구 중 500명이 아트센터에 등록된 예술가라는, 중앙 호주에서 가장 큰 원주민 커뮤니티다. 엄청난 먼지 바람과 함께 사막의 모래가 붉어지더니 허허벌판에 판잣집들이 띄엄띄엄 모습을 드러낸다. 자전거를 타고 노는 아이들이 눈에 띄지만 거리에 어른들은 거의 없다. 남자 어른들은 매년 10월경 비밀스런 성인식을 위해 어딘가로 떠나는데, 구체적으로 무얼 하는지 여자들은 모른단다.

여자들은 왈라쿨랑구(Warlukurlangu) 아트센터에 모여있었다. 야외 테이블에서 열심히 점을 찍던 루쓰가 이씨의 휴대전화 케이스에 새겨진 태극마크를 본 적 있다며 아는 체를 한다. 바닥에 앉아 동심원 문양을 그리고 있는 카렌에게 뭘 그리고 있느냐 물으니 ‘드리밍(dreaming)’이란다. 기호나 상형문자 같은 그림들로 뭘 꿈꾼다는 걸까.

알고 보니 작품 컬렉션 대부분이 ‘seeds dreaming’ ‘rain dreaming’처럼 ‘드리밍’을 제목으로 달고 있다. 여러 겹의 동그라미로 물웅덩이를 그린 ‘water dreaming’이 가장 많았다. 이곳에서 13년 일했다는 운영자 씨실리아에 따르면 ‘드리밍’이란 창조의 이야기들이란다. 원주민어로는 ‘쥬쿠파(Tjukurpa)’. ‘세상의 창조방식이 우리 생활에 주는 영향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말이 어렵지만, 언뜻 항공사진이나 지도처럼 보이는 이들의 그림은 결국 삶의 터전에서 살아남는 지혜 그 자체다. 사막 생활에 필수적인 물 웅덩이와 야생 먹거리의 여정, 지형과 자연현상 등 수만 년간 동굴 벽화나 바닥화, 몸의 장식 등으로 계승돼오던 이야기를 캔버스로 옮겼다. 이런 이야기는 주로 점찍기 방식으로 그리는데, 원주민 미술을 ‘점아트’라고 표현할 만큼 전국에 고르게 분포된 대표적 표현양식이다.

“조상들의 삶에서 나온 그림이란 게 재미있네요. 3시간을 차로 달려도 풍경이 다 똑같을 만큼 보이는 게 한정돼 있으니 전해들은 것에 의존해야 했겠죠. 보는 것보다 들은 것으로 살아야 하니 상상력이 발달할 수밖에요.” 이씨의 해석에 이 그림들이 현대 미술과 비슷해 보이는 이유가 어렴풋이 납득이 갔다.

“다 함께 도트 페인팅을 체험해 보자”는 이씨의 제안에 얼결에 물감과 막대기를 골라 자리를 깔고 앉았다. 단순해 보이던 점찍기가 의외로 힘들었다. “이게 쉬운 게 아니네요. 스케치도 없이 그리는 저들의 미감이 새삼 놀라워요.” 혀를 내두르면서도 이씨는 작은 캔버스에 본인의 색깔이 묻어나는 작품을 3점이나 완성했다.

13 ‘지구의 배꼽’ 울루루. 구석구석 원주민들의 창조신화가 가득하다.
14 캥거루 꼬리 고기를 먹으러 간다고 들뜬 우엔두무의 원주민 아이들. 15 캥거루 꼬리가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아이들. 16 원주민 아이들도 말춤을 좋아했다.

원주민도 ‘강남스타일’
한낮이 되니 햇살이 뜨거워 아무 활동도 할 수 없다. 해가 기울 무렵 어딘가로 향했다. 30분 정도 황량한 사막을 달리니 뜬금없이 커다란 바위들이 첩첩이 쌓여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다. 원주민들의 성지인 ‘워터 드리밍 사이트’란다. 북극 바다를 표류하는 빙하처럼 왜 허허벌판에 유독 여기만 바위가 쌓여 있을까. 원주민들도 이를 신성시 여긴 모양이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라고 했다. 마침 우리가 도착하니 갑자기 비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쳤다. 6개월여 만에 처음 오는 비란다.

저녁에는 원주민들의 식량인 캥거루 꼬리 고기를 맛보기로 했다. 또다시 사막을 관통해 어딘가로 갔다. 왜 이리 멀리 왔느냐고 물으니 이곳은 또 다른 성지란다. 유목시절 음식이 생기면 신성한 장소로 가서 춤추고 노래하며 음식을 먹던 전통 때문이라고 했다. 야트막한 동산을 오르니 거대한 구멍이 싱크홀처럼 아래로 뻥 뚫려 있다. 10m 깊이는 족히 될 듯한 암벽동굴은 주변에 살았다는 거인 전설의 흔적이란다.

모닥불에 캥거루 꼬리 고기를 굽는 동안 원주민들은 뭔가 보여주려는 듯 노래를 부르고, 할머니의 구음에 맞춰 아이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영 어색한 분위기. “얘들이 순수해서 그런가 너무 수줍어하네.”

이씨가 춤을 배워보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아이들이 캥거루, 에뮤 등 어설픈 동물 흉내를 내며 그게 춤이란다. 이씨가 한동안 열심히 따라 하니 우리 춤도 가르쳐달란다. 말춤이라도 추자며 스마트폰에 저장된 ‘강남스타일’을 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여섯 살짜리 아이들이 많이 춰본 듯 신나게 말춤을 리드하는 것이다. 비로소 어색한 분위기가 녹고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 대체로 우울해 보이던 원주민들을 처음으로 활짝 웃게 한 싸이가 새삼 고마웠다.

소유하지 않고 꿈꾸는 자유
원주민들이 그토록 꿈꾸는 ‘물 웅덩이’는 어떤 곳일까. 원주민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모티브인 ‘물웅덩이’를 찾아 나섰다. “엄청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될 것”이라는 씨실리아의 말에 기대는 부풀었지만, 가도 가도 똑같은 풍경에 지치고야 말았다. 그 풍경을 3시간 넘게 견디니 그제야 얕은 계곡이 보였다. 뾰족뾰족한 수초들만 빼곡하고 물은 거의 말라 있는 계곡을 한참 따라 올라가니 비로소 거대한 ‘물 웅덩이’가 시원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강 ‘핑크(Finke)’에 연결된다는 글렌 헬렌(Glen Helen) 협곡. 땅에서 솟아나 절대 마르지 않는 물이란다. 땡볕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만난 감흥이라니. 수풀에 돌아다니는 커다란 도마뱀마저 귀여워 보였다.

“왜 물을 동그랗게 그리는지 알겠네요. 우리 강처럼 풍성히 흐르는 물이 아니라 땅에서 샘솟아 고여있는 물이 이들에겐 생명수였겠죠. 얼마나 소중하면 ‘드리밍’이라 하겠어요. 우리 꿈은 달나라에 가는 것인데 이들의 꿈은 물 찾고 음식 찾는 것이었나 봐요. 기적같이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찾아다니던 삶에 대한 그림인 거죠.”

물이 있는 곳에 정착하는 법인데 왜 사막을 떠돌며 유목을 계속했을까. 원주민들은 농경도 목축도 하지 않고 그저 떠돌며 땅이 선물한 물과 음식을 고맙게 먹어왔다. ‘땅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땅이 내 주인’이라는 게 저들의 사고방식이라더니,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는 무소유의 정신이 이들의 육체마저 자유롭게 한 것일까.

17 Rosina Ryder의 ‘Untitled’, acrylic on canvas, 80.5 x 46 cm 18 야렌티 알테레 아트센터의 인형작품들. 19 Evelyn Young의 ‘Untitled’, acrylic on fiberglass. 48 x 17 x 15 cm
20 왈라쿨랑가 아트센터의 작품들.

영혼이 담겨 있어 진짜 예술
원주민들이 최고로 여기는 성소는 ‘지구의 배꼽’이라 불리는 울루루다. 중앙 사막 한복판, 마치 망망대해에 떠 있는 외딴 섬처럼 솟아있는 둘레 9.4km짜리 거대한 바위다. 여기엔 온갖 창조 신화가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지역의 그림이나 공예에는 유독 뱀이 많은데, 이는 울루루의 창조 신화인 비단뱀 쿠냐에 관한 것이다. 원주민 가이드와 돌아본 울루루에는 사악한 독사를 물리치고 신성한 힘을 얻은 쿠냐의 흔적이 가득한데, 가장 깊숙한 곳에 역시 물웅덩이가 있었다. 독사를 물리치고 물뱀으로 변한 쿠냐가 지금도 살면서 물을 공급해 준다는 신성한 곳이다. ‘잠시 눈을 감고 물소리에 귀 기울여보라’는 안내문과 ‘물을 더럽히면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는 경고문이 함께 붙어 있었다.

뜻하지 않게 ‘원조’ 원주민 미술을 만난 곳도 울루루다. 터널처럼 뚫려 있는 동굴에 2만 년 전 그려진 벽화가 어제 그린 듯 생생하고 선명했다. 물웅덩이, 사람 기호 등 요즘 원주민 회화에도 보이는 모티브들이 면면히 전해져 온 삶의 역사를 새삼 증언하고 있었다.

마지막 방문지는 울루루가 마주 보이는 마루쿠(Maruku) 아트센터. 목공 분야 최고 장인이라는 빌리와 함께 이씨가 작은 타악기를 만들었다. 이씨가 작은 끌로 나무껍질을 벗기면 빌리가 줄로 표면을 부드럽게 갈고, 부인 룰루가 모닥불에 지진 인두로 무늬를 새겨 넣으니 나무토막 두 개가 한 시간 만에 근사한 악기로 변신했다.

“예전에는 돌이나 동물의 이빨로 만들었대요.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우리 삼국시대보다 원시적인 모습으로 최근까지 살아온 거죠. 저들을 보니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네요. 디자인이 내 삶이라고 얘기하는데, 이렇게 단순한 삶을 사는 이들에겐 행복이 뭘까 싶었죠. 그런데 부부가 서로 쳐다보는 다정한 눈빛에 아차 싶더군요. 원주민의 삶이든 우리 삶이든 100년 뒤 미래의 삶이든, 인간의 삶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욕심부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게 얼마나 덧없는 일인가요.”

원주민들의 성지 순례는 우리를 겸손하게 했다. 우리가 궁금했던 원주민 미술의 비밀 또한 아주 근본적인 물음으로 귀결됐다. 예술이란 뭘까. 입시학원을 거쳐 미대를 나오면 예술가로 인정받고, 그럴싸한 철학을 앞세우면 예술의 자격을 얻는 것일까. 가장 원시적인 삶을 살면서 미술 교육을 받은 적도, 어려운 철학 따윈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그림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안에 저들의 곰삭은 삶과 영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게다.

앨리스 스프링스·우엔두무·울루루(호주)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na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DESART 취재협조 주한호주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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