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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몇 개만으로 스쳐가는 대상 묘사 게임처럼 스릴 넘쳐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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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호 24면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휴대전화가, 디지털카메라가, 태블릿PC가, 모두를 사진가로 만든다. ‘호모 포토그라피쿠스(Homo Photographicus)’라는 신조어가 나올 참이다. 특히 패션계야말로 이런 ‘사진 전성시대’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분야다. 입고 걸치는 모든 것이 피사체다. 길거리 불특정 다수의 옷차림을 대상으로 하는 스트리트 패션 사진이 대세가 된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리처드 하인스

이런 의미에서 리처드 하인스(Richard Haines·63)는 시대를 거스르는 아티스트다. 패션 포토그래퍼들이 각축을 벌이는 뉴욕에서 사진이 아닌 일러스트레이터로 이름을 날린다. 매일 뉴욕의 거리에서 마주치는 스타일리시한 사람들을 스케치하고, 이를 ‘What I saw today’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다. 입소문이 나면서 2012년 프라다 남성복에 일러스트를 그려 대중적 인지도까지 높인 상태다. 이제는 제이크루·바니스·코치 등 브랜드와의 협업 외 GQ·뉴욕타임스 스타일 매거진 등 잡지에서도 그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엔 한국과도 인연을 맺었다. 올 겨울 캐주얼 브랜드 톰보이(TOMBOY)와 컬래버레이션을 선보인 것. 브랜드의 코트 착장 스타일을 그만의 일러스트 방식으로 다시 그려냈다. 이 작품들은 내년 1월 말까지 톰보이의 주요 매장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 지난달 서울에 들른 그와 마주했다.

리처드 하인스는 서울의 거리에서도 옷차림이 눈에 띄는 이들을 그렸다. 특유의 간결한 선을 통해 두 사람의 특징을 순간적으로 표현했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계기는.
“원래 직업은 캘빈클라인, 페리엘리스, 노티카 등의 디자이너였다. 그런데 2008년 경제 위기가 닥치자 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주변에서 그림을 그려 블로깅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시내를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운 좋게도 내 블로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이름이 알려졌다. 솔직히 말하면 뉴욕에 처음 왔던 1970년대부터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었는데 당시는 사진가가 주목받던 시대였다. 그래서 대신 디자이너를 택했다. 생각해보면 세월이 돌고 돌아 진짜 내 자리를 찾은 것 같다.”

그림은 사진가처럼 순간적으로 찍을 수 없다. 누구를 포착하고, 어떻게 작업하나.
“전화기로 찍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그런 시간조차 없을 때가 많다. 그런 경우 짧은 스케치를 통해 바로 그림을 완성한다. 가끔 특별히 마음에 드는 이가 있으면 스튜디오로 초대해 그리는 경우도 있다. 나는 특별히 패션피플이라기보다 스타일이 있는 사람, 그만의 캐릭터를 지닌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옷을 잘 입는다, 멋지다가 아니라 특징이 분명해야 한다. 눈·코·입의 디테일부터 배경과의 어우러짐, 분위기까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작용한다.”

시간적 제약만큼 관찰력이 있어야 할 텐데.
“패션쇼에 참석해 모델들을 스케치하는 경우 30초 남짓 하는 짧은 시간 동안 옷과 디테일 등을 빠르게 포착한다. 순간 스쳐가는 대상을 그려내는 건 나에겐 게임과 같은 스릴을 준다. 얼마나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걸 잡아내고 표현할 수 있는지에 박진감을 느낀다. 당연히 그림은 세세한 디테일 보다는 전체적인 형상에 집중한다. 석탄 연필이나 오일 크레용을 사용해 전체적인 형태와 특징을 잡아내고, 옷에 특징이 되는 디테일을 조금 더 묘사한다. 이번에 함께 작업한 6개의 톰보이 코트 역시 단순한 형태가 매력적이었다.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이 잘 드러나 있다.”

캐주얼 브랜드 ‘톰보이’와 협업한 일러스트레이션. 브랜드의 코트 착장을 그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주요 매장에서는 그의 그림과 대상이 되는 옷을 함께 선보인다(아래 사진).

사진을 찍는 보통 패션 블로거들과의 차이는.
“표현하는 매개체가 다를 뿐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목적은 같다고 본다. 다만 나는 그림에 대해 각별한 기억이 있다. 1960년대엔 해마다 여름방학을 할아버지와 함께 보냈다. 그때 할아버지 집에 뉴욕타임스가 매일 배달됐는데, 신문에 실린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면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단 몇 개의 라인만으로도 아름다움과 고통이 함께 느껴지는, 그러니까 많은 걸 표현해 내는 게 신기했다. 거기서부터 내 절제된 일러스트레이션이 탄생한 것 같다. 마치 에곤 실레 같은 아티스트의 그림을 보면 몇 개의 선만으로도 고통과 환희 등 작가의 모든 감정과 정서를 느낄 수 있지 않나.”

블로그에 올리는 작품은 대중성에 치우치지 않나.
“현재 블로그말고도 인스타그램·페이스북·트위터 등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나도 훌륭하다는 코멘트나 ‘좋아요’가 적으면 낙심하곤 했지만, 이제는 내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생각해본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계속 작업할 예정이다.”

그는 서울에서의 짧은 일정 중 홍대앞·도산공원앞·이태원 등 도심 곳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리고 만나고 스치고 본 사람들을 차곡차곡 선으로 기록했다. “새로운 곳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 도시만의 특성을 찾아내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다음 일정을 물었더니 아니나다를까. “길거리에서 만났던 어떤 사람에게 부탁을 했어요. 제대로 그리고 싶다고요. 다시 만날 거예요.” 말을 전하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gang.co.kr, 사진 톰보이, 리처드 하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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