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미군부대 앞 담벼락 명물
역사는 거창한 게 아닙니다. 당신의 어머니, 또는 그 어머니의 어머니…. 그들이 살아낸 세월이 역사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해주시는 이야기는 소중합니다. 그들의 인생 역정을 듣는 일은 때로 수십 권의 역사책을 읽는 일보다 소중한 역사 체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주 Week&은 지난 세기를 고단하게 살아낸 한 할머니의 회상에 귀 기울였습니다. 반세기 가까이 옹기만 팔아온 신연근(70) 할머니가 그 주인공입니다. 할머니와 함께 세월을 거슬러 오르며, Week&은 여러 번 울고 웃어야 했습니다.
▶ 곱게 찍어드리고 싶은 욕심에 새벽부터 신연근 할머니를 귀찮게 했다. 4시간 만에 "다 찍었어요. 고생하셨습니다"라며 카메라를 집어넣는데, 갑자기 지폐 몇 장을 쥐여 주려 하셨다. "필름을 너무 많이 써서 어째?"라시며. 애써 손사래 치며 나서는 길, 마음만은 친할머니께 용돈이라도 받은 듯 풍성했다.
서울 남산 3호 터널을 지나 반포대교 쪽으로 달리다 보면 이태원 못 미쳐 오른쪽으로 미군 부대가 있다. 철조망으로 된 쪽문에는 경비를 서는 경찰이 둘. 군 부대를 경찰이 지키다니 별 재밌는 풍경 다 보겠다 싶은 생각도 잠시, 찬찬히 살펴보니 경찰보다 더 도드라지는 것들이 있다. 담벼락을 따라 족히 50m는 될 법한 길이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옹기들. 크기도 색깔도 어찌나 다양하고 고운지, 무슨 설치미술작품이라도 보는 듯하다.
신기한 마음에 옹기들을 따라 남산 순환도로로 난 샛길로 접어드니 가게가 바로 눈에 띈다. '아, 파는 물건이었구나.' 알아도 신기함은 그대로다. 동네마다 재래식 시장이 있고, 그 시장마다 옹기가게들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 서울 한가운데, 그것도 미군 부대 앞에서 옹기가게를 만나게 될 줄이야. 게다가 가게의 겉모습부터 심상찮다. 빛 바랜 간판과 군데군데 녹이 슨 미닫이문. 언뜻 봐도 제법 세월이 느껴진다.
이 가게 이름은 '한신옹기'. 남편(한태석씨)의 성과 자신의 성을 한 글자씩 딴 이 가게에서만 벌써 38년 동안 옹기를 팔고 있는 있는 이는 신연근 할머니다. 할머니의 연세는 일흔. 손자들 재롱이나 즐기면 좋을 나이건만, 평생을 바지런하게 살아온 할머니의 일상이 아직도 '안방마님'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무릇 장사라면, 손님이 언제 오든 헛걸음을 시키면 안 된다'는 철칙에 따라 할머니는 1년 365일 가게를 연다.
할머니는 어지간한 서울 근교에서 주문이 오면 직접 택시를 타고 배달도 다닌다. 어떤 때는 택시비도 안 남지만 "옹기를 찾아주는 게 고마워 어쩔 수가 없어"란다. 한번은 춘천에서 9만원어치 옹기 주문이 와 택배비를 물어가며 보내줬단다. 그런데 그만 배달 중에 옹기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망설임 없이 7만원을 주고 용달차를 불러 직접 새 옹기를 싣고 내달렸다. 물론 처음 9만원 외엔 한푼도 더 받지 않은 채로였다.
이뿐이 아니다. '베테랑 장사꾼'인 할머니는 못하는 게 없다. 이태원이 가깝다 보니 기념품 옹기를 사러 가게를 찾는 외국인이 적지 않다. 차츰 늘어나더니 이젠 아주 손님의 절반도 넘는다. 할머니 학력은 '소학교(초등학교)' 3년 중퇴가 끝. 그래도 할머니는 주저없이 외국인을 맞는다. "영어 그까짓 거 뭐 어렵나. '하우 마치(how much)' 하면 얼마냐는 거고, '레이타(later)' 하면 안 사겠다는 건데." 달러를 내는 이들도 있어 아침마다 환율까지 챙겨 둔다는 할머니다.
할머니의 가게터는 이제 서울 안에서도 꽤 땅값이 비싼 축에 든다. 서른 평이 안되지만, 거기에 3층으로 양옥을 지어 올려놨으니 못 잡아도 수 억원대 재산은 되는 셈이다. 여기에 할머니는 제 몫 착실히 하며 살아가고 있는 6남매(4녀2남)도 두고 있다. 일과 재산, 그리고 자식들. 부러운 노년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오늘이 거저 찾아온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시절 고생 안 한 사람이 어딨을까마는 할머니의 세월은 유난히 혹독했다.
할머니는 1936년생으로 고향이 이북(강원도 이천)이다. 문자 그대로 '삼팔 따라지'다. 광복 후 내려와 서울역 뒤 만리동에 자리를 잡았다. 동란 동안 피란 다녀온 걸 빼면, 할머니는 이 '달동네'에서 스물두 살 때까지 삯바느질을 하며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밑으로 코흘리개 남동생이 둘. 호롱불 밑에서 땀을 늘려봐도 가난은 쉬이 벗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부쳐 먹을 땅이 있다는 집에서 혼담이 오자 부모님은 할머니를 바로 떠나보냈다. 설명이라고는 "굶진 않을 게다"가 전부였다.
시집은 경기도 용인이었다. 두 살 위 남편은 당시 '카투사(미군에 배속된 국군)'였다. 미군 보급품이 줄줄이 새던 시절. '나쁜 마음' 좀 먹었으면, 한 밑천 챙기는 것도 가능했으련만, 남편에겐 요령이 없었다. 설상가상 시집간 지 반년도 못 돼 시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시아버지 잡아먹었다"는 동네의 쑥덕거림도 서러웠지만, 무엇보다 생계가 문제였다. 알고 보니 시집 땅은 모두 종중 것. 3대독자 종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땅도 함께 사라졌다.
다른 길이 없었다. 남편이 제대를 하자 무작정 상경했다. 시집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배고프다고 울어대는 시동생만 넷. 그 중 막내는 돌배기였다. 손에 쥔 돈은 달랑 3000원. 방 한 칸 얻는 데 3만원이 들던 시절에 장사 밑천도 못됐다. 막막했다. 할머니는 남편을 '꼬리'로 달고 친정집 더부살이를 택했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안 한다는 처가살이지만, 뭐라도 해보려면 달리 방도가 없었다.
중고 '리어카(손수레)'를 구해 채소장사를 시작했다. 일은 고됐다. 논밭을 돌며 푸성귀를 사들인 뒤 웃돈을 붙여 청량리 시장 장사꾼들에게 파는 일. 말이 좋아 도매였지, 크게 사들일 돈이 없으니 남는 돈도 뻔했다. 그나마 모두 시집에 보내면, 친정엔 내놓을 게 없었다. 남편 먹을 밥 한 공기는 따로 챙겼지만, 할머니 몫은 없었다. "어느 날은 구리에서 배추를 사 오다가 남편이 신발을 잊어버렸어. 힘을 써야 하니까 내 신발을 벗어주고 뒤에서 수레를 미는데, 그땐 망우리 고갯길이 자갈밭이었거든. 그러니 발이 온통 갈라져 피투성이가 됐는데, 배가 고파서 온몸에 힘은 하나도 없고.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채소장사를 한 지 1년여 만에 살 길이 열렸다. 시집 주변에 살던 '옹기장이'들이 딱한 사정을 듣고 옹기를 떼다 팔라고 권했다. 할머니는 친정에서 멀지 않은 후암동 비탈에 땅을 빌려 옹기를 쌓아놓고, 아침이면 남편과 리어카를 끌고 장사에 나섰다. 이미 그때 세 살 터울의 딸이 셋. 봐줄 이가 없었기에, 할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장사에 나섰다. 위로 둘은 옹기에 싣고, 갓난쟁이 막내는 업은 채로였다. 그래도 나아지는 벌이에 행복하던 시절. "애들을 태우면 신이 나 옹기에서 고개를 내밀고 방실거렸어. '항아리 사아~려'를 외치는 애들 아빠 목청도 카랑카랑하니 듣기 좋았지."
물론 몸도 편했단 소리는 아니다. 이렇게 시작한 '옹기 도부꾼(행상)' 생활은 10년이나 이어졌다. 그 사이 할머니의 고생은 끔찍했다. "끼니를 두부 반 모로 살았어. 세 모로 둘이 하루를 산 거지. 그런데 장사를 하러 산동네로 다녀야 했거든. 잘 사는 동네엔 옹기가게가 있으니까.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 언젠가는 허기를 못 참고 국수가게에 들어간 적도 있어. 그런데 결국 그냥 뛰쳐나왔지. 냄새로만 배를 채우고 말이야."
이렇게 10년을 모은 뒤에야 할머니는 지금의 터에 제대로 된 가게를 열 수 있었다. 67년의 일. 운이 좋아 서울시로부터 땅을 헐값에 살 수 있었다. 당시 동네 이름이 '해방촌'. 전국에 흩어져 있는 다른 '해방촌'들처럼 허름한 동네였단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광복 이후 대도시로 무작정 몰려든 빈농들이 주저앉은 곳이다. 어딜 봐도 엉성한 판잣집들과 지긋한 가난만 빼곡한 동네였다.
이 터를 잡을 때도 일화가 있다. 은행에서 돈을 떼어먹는다고 믿던 시절. 할머니는 옹기에 돈을 모았다. 물건을 판 돈이었으니 지폐와 동전이 마구 섞여 있었다. 할머니는 땅값을 내라는 통지를 받곤 돈을 독째로 캐내 머리에 이고 용산 세무소를 찾았다. 그러나 콧대 높은 공무원들이 잔돈을 받을 리 만무. 수표로 끊어오라는 성화에 할머니는 은행을 찾아나섰다. 그런데 평생 살며 들어본 은행이라곤 한국은행뿐. 할머니는 한국은행에 들어가 돈을 바꿔달라고 했단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려. 결국 욕만 실컷 얻어먹고 겨우 근처 주택은행에 가 돈을 바꿨지(웃음)."
가게를 여니 리어카를 끌 때보다 고생은 덜했다. 그런데 이번엔 집이 문제였다. 땅을 사느라 남은 돈이 없었다. 성실했던 남편도 '술독'에 빠져 집안일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모든 문제는 할머니가 해결해야 했다. 어설프게 '블로꾸(벽돌)'와 판자로 집을 지었지만, 곧바로 구청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불법 건축물이라는 게 이유. 눈에 보이는 성과만 중시하던 '개발독재시대'. 서울의 상징인 남산 자락에 들어선 판잣집들은 눈엣가시였다. 그래도 여섯으로 불어난 아이들을 한뎃잠만 재울 수 없어 할머니는 틈틈이 벽을 쌓았다. 물론 그때마다 이튿날로 야멸치게 철거반이 찾아왔다.
"철거에 '철' 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는 할머니. 결국 4년 동안 스무 번 철거를 당한 끝에 꾀를 냈다. 굴집을 짓기로 한 것. 할머니와 자식들은 구청직원들 모르게 추석연휴 때 땅을 파고 구들장을 얹었다. "위에는 판자를 덮고 그 위에 흙을 뿌려 안 보이게 했지. 전기도 수도도 없었어. 처음에는 환기구멍을 낼 줄도 몰라 아이들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을 뻔도 했어. 그래도 새벽이슬을 안 맞으니 살 것 같았지."
'호사다마(好事多魔)'. 이 말은 진짜 좋은 세상이라곤 살아보지도 못한 이들에게 더 잘 들어맞는다. 할머니에게도 그랬다. 82년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빈 속에 '막소주'를 퍼붓더니 유언 한마디 옳게 남기지 못한 채 가고 말았다. 어차피 생계는 할머니의 몫. 그러나 아무리 야속해도 남편은 있는 것만으로 큰 힘이었다. 떠난 뒤에야 그 사실이 사무쳤다. 후회가 남편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더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가게를 열었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배달을 마다하지 않았다. 근처에 네 개나 생겨난 옹기가게들이 싸구려를 팔 때도 흔들림 없이 양질의 옹기만 고집했다. 가게에 닿아있는 미군부대 담벼락에 옹기를 쌓아놓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 조금이라도 더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맙게도 미군측은 단 한 번도 옹기를 치우라고 닦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네 담벼락을 장식해준 것처럼 즐거워했다. 끼니 때면 근처 기사식당에서 세차도 했다. 고도성장기. 택시가 마구 늘어나는 통에 그 벌이도 나쁘지 않았다.
남산 2호, 3호 터널 공사 때마다 조금씩 허물어져 고생을 시키던 굴집을 메워버리고 '양옥집'을 지은 것은 88년이었다. 무려 17년을 빛 한 줌 새어들지 못하는 땅 아래서 산 것. 올림픽을 앞둔 경기는 흥청망청이어서, 할머니에게까지 돈이 꽤 돌았다. '환경미화'에 열을 올리던 서울시도 번듯한 집을 짓는다는 말에 까탈부리지 않고 건축허가를 내줬다. 살 때부터 기다랗기만 해서 좀 우스꽝스럽던 땅. 집을 올려놓으니 방들도 열찻간 같았다. 그래도 할머니에겐 그저 궁궐이었다.
힘들게 기반을 잡고 나니 그 다음엔 어렵지 않더란다. 혼자 장사하고 아이도 길러야 했으니 왜 고생이 없었을까만,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고생 같지도 않았더란다. 게다가 '국민학교' 육성회비 한번 제때 내준 적 없건만, 6남매도 바르게 자라줬다. 무엇보다 큰 기쁨. 위로 세 딸은 고등학교까지, 넷째 딸과 밑으로 두 아들은 대학까지 마쳐 줄 수 있었다. 이제는 모두 착한 짝까지 골라 번듯하게 살아가며 어머니께 용돈도 쏠쏠하게 쥐여주는 효녀.효자들이다.
장성한 자식들 바람대로 이제 좀 쉬어도 좋으련만, 할머니는 늘 "앞으로 5년은 더 장사를 할 수 있다"고 고집을 피운다. 아예 한 술 더 떠 "배달을 제대로 하려면 아무래도 운전면허를 따야겠어. 할머니가 면허 따면 또 기사 써줘야 해"라며 원대한(!) 포부를 밝히기도 한다. 너무 좋아한다는, 그래서 어딜 가든 하나씩은 주워와야 직성이 풀린다는 차돌을 꼭 빼닮은 '단단함'이다. 그러고 보니 가게에 붙은 할머니 쪽방 곳곳이 차돌이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저 돌들을 왜 좋아할까. 할머니의 대답 역시 차돌처럼 차지다.
"단단하잖아. 안 깨지잖아. 힘들던 시절에도 차돌을 보면 '나도 저래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어. 그래서 지금도 차돌만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 요즘 불경기라고, 취직 안 된다고 맥 빠져 있는 젊은 사람들도 차돌 보면서 나처럼 생각해 주면 좋겠는데. 힘들 내라고!(웃음)"
글=남궁욱 기자.김경화 인턴기자<periodist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요즘엔 쌀독이 잘 나가" 할머니가 말하는 옹기 유행
행상 10년, 도매상 38년. 모두 48년 동안 옹기만 팔아온 신연근 할머니. 풀어놓는 옹기 이야기만도 그득하다.
할머니에 따르면 옹기에도 유행이 있다. 할머니가 처음 장사를 시작하던 1950년대엔 겉이 반짝거리는 옹기가 없었단다. 옹기 유약이 넉넉하지 못했던 모양. 그러나 70년대 윤이 나는 '광명단 옹기'라는 것이 나와 인기를 끌었다. 물건이 없어 못 팔았을 정도. 그렇지만 이 광명단이라는 유약에 납이 들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80년대 소비자들은 무광 옹기를 찾게 됐다. 90년대 이후로는 다시 광택 있는 옹기가 인기를 끄는 추세. 전통 유약인 잿물을 써 인체에 무해하단다.
할머니는 옹기의 '맞수'들을 꼽기도 한다. 뭐니 뭐니 해도 옹기의 가장 큰 용도는 장독과 김장독. 그러나 간편한 용기에 담아 파는 간장과 된장이 유행하면서 커다란 장독을 찾는 손길은 뜸해지고 말았다. 김장독의 운명도 마찬가지. 80년대에는 각종 플라스틱 제품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면서 '김장통'들이 김장독의 자리를 위협했다. 90년대 이후론 적수가 더욱 강력해져 김장독처럼 김치의 맛을 간직할 수 있다는 김치냉장고가 옹기의 자리를 야금야금 빼앗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요즘 가장 인기를 끄는 옹기는 쌀독으로 쓸 수 있는 중간 크기 옹기란다. 쌀을 오래 둬도 벌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주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결과. 그나마 옹기가 홀대받는 시대에 기쁜 소식이다. 신 할머니는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옹기는 숨을 쉬는 그릇"이라며 "쌀뿐 아니라 장도 김치도 역시 장에 두고 먹어야 역시 제맛"이라고 옹기 예찬론을 펼쳤다.
남궁욱 기자<periodist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