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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⑤여성] 46. 우리는 산업역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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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방직 입사 후 3개월쯤 됐을 때의 이총각씨 모습. (왼쪽에서 둘째)

▶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승객을 다 태우려면 버스안내양은 버스에 매달려 가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며 웃으며 일했다.

▶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도시로 상경한 소녀들은 마산 수출자유지역으로, 서울 구로공단으로 몰려들었다. 사진은 1970년대 가발 공장에서 가발을 꿰매고 있는 여공들. <중앙포토>

일당 70원, 한달 월급 3000원. 허연 깍두기에 간장, 눈물밥 먹어가며 일만 했다. 세상은 ‘공순이’라 놀려댔지만 그럴수록 허리띠를 졸라맸다. 훗날 한국 경제가 이만큼 큰 데는 이들이 있었다.

소녀 이총각(56)이 인천 동일방직에 들어갔을 때는 만 열여섯 살이었다. 1966년 1월 8일. 공장에 입사한 게 너무 기뻐 지금도 그 날짜를 생생히 기억한다. 같은 회사에 다니던 성실한 언니 덕분에 과장에게 조기 한 상자를 바치고 들어갔다. 다른 친구들은 간부집에서 1~2년간 식모살이를 하고서야 겨우 들어갔던 자리였다.
1남6녀 중 셋째딸. 외할머니는 남동생을 보라며 총각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이름값을 했는지 밑으로 남동생이 태어났다. ‘여공’총각은 어떻게 해서라도 동생들만은 공부를 시키고 싶었다. 중학교를 한 학기밖에 다니지 못한 좌절된 배움의 길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어머니도 도와야 했다. 어머니는 1ㆍ4 후퇴 때 인천으로 피란 와 석탄장사ㆍ생선장사 등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공장에 갔더니 집채만한 기계가 돌아가는데 귀청이 떨어질 것 같더라고요. 솜먼지가 눈처럼 날리고…. 지옥이 따로 없다 싶데요.”

저승사자 같은 지도위원이 소음 때문에 악을 쓰며 일을 가르쳤다. 최소한 12시간을 일했다. 그래서 받은 일당이 겨우 70원. 잔업수당을 합쳐도 한 달에 3000원이 안 됐다. 그해 근로자 평균임금 8324원(중앙일보 67년 12월 29일자)의 3분의 1도 안되는 저임금이었다. 그래도 총각은 이를 악물고 일했다.

“어찌나 열심히 일했던지 1400명 중에서 상이란 상은 혼자 다 받았어요. 양은 냄비를 상으로 받았는데 온 가족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당시 회사에서 1분에 140보 걷기운동을 했는데 총각은 160보를 걸었다. 아니 뛰어다녔다. 남들이 10대의 기계를 관리할 때 12~13대의 기계를 봤다.

이총각은 60~70년대 우리 누이들의 자화상이다. 수많은‘이총각’이 농촌에서 대도시로 쏟아져왔다.

71년. 마산수출자유지역에는 총 1248명의 근로자가 있었다. 이 중 89%인 1119명이 여성이었다. 대부분이 만 18~25세였다.

여성 근로자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했다. 섬유ㆍ의류ㆍ봉제ㆍ전자업에서 주로 일했다. 장시간 근로와 저임금, 인권의 사각지대는 그들이 처해 있던 현주소였다. 수출산업의 70%를 차지할 만큼 수출에 기여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공순이’라 불렀다. 가발제조업체인 YH무역에서 일했던 최순영(민노당)의원은 “대부분의 친구가 2500원의 월급을 부모님 약값이나 오빠 학비로 보내는 바람에 배움의 길과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은 좌절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버스안내양은 여공과 함께 이 시절 ‘여성 직업’ 중 하나였다. 서울에서 61년부터 버스안내원이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면서였다. 65년 전국의 버스안내양 수는 1만7160명. 대부분 18세 전후의 나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배움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직업현장에 뛰어들었다.

새벽 4시면 일어나야 했고 5시부터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루 종일 버스에 매달려 목이 터져라고 “오라~잇” “스톱”을 외쳤다. 이 같은 일을 반복하길 하루 7~8 차례.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 속에 승객을 배로 밀어넣고도 다 태우지 못해 ‘개문발차(開門發車)’는 예사였고 이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도 더러 있었다.

70년대 말 인천 제물포운수에서 버스 안내양을 했던 박경순(52ㆍ가명)씨는 “겨울에 문 손잡이를 잡으면 손이 쩍쩍 달라붙어 살점이 떨어질 것 같았고 발은 항상 동상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66년 서울시가 인권주간을 맞아 버스안내양 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은 더욱 눈물겹다. 아침식사는 오전 5시 이전. 저녁은 자정이 넘어야 먹을 수 있었다. 반찬이라곤 ‘허연 깍두기와 간장, 기껏 잘해줘야 콩나물과 된장국’정도였다. 그나마 10분 안에 먹느라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이렇게 일하고 받은 일당은 140~160원(66년 기준) 정도였다. 여기서 하루 식비 90원을 빼고나면 월 1500원을 넘지 못했다. 그래도 버스안내양은 인기 직종이었다. 별다른 훈련이 필요없는 데다 다른 직종에 비해 보수도 높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점은 침식이 제공된다는 것. 대부분이 농촌 출신의 상경 소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식 제공의 실태도 들여다보면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보통 2평짜리 방에 9명이 모여 살고 나머지는 차주집에서 횡포에 가까운 감시·감독을 받으며 지냈다.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몸수색이었다. 버스요금을 가로채는 ‘삥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차주들은 기사나 간부까지 동원해 일상적으로 몸수색을 했다. 66년 버스요금이 회수권으로 바뀌자 차장들의 호주머니를 면도칼로 쫙쫙 찢고 78년엔 아예 호주머니가 없는 유니폼을 만들기도 했다.

이 같은 횡포에 버스안내양들은 집단 농성과 시위, 극단적으로는 자살로 결백함을 증명하기도 했다. 반라로 2시간 동안 농성을 벌이고, 승차거부를 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버스안내양은 82년 시민자율버스가 생기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박씨는 “안내양들에게 유일한 꿈은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었다. 배움의 길이 좌절되면서 생긴 소망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 꿈을 이룬 누이들은 얼마나 될지….

문경란 여성전문기자ㆍ박혜민 기자

여성직업 변천사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사 가운데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 중 하나가 ‘여성전용 직종’의 등장이다.
이 직종들은 60∼70년대 여성들을 경제활동 현장으로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다. 최근에도 주부 및 미취업 미혼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종 ‘여성전용 직종’ 및 여성들이 90% 이상인 ‘여성 집중 업종’이 생겨나고 있다.

◈화장품 방문판매
태평양이 처음 시작한 화장품 방문판매사원제도는 1964년 9월 시작됐다. 현재 이 회사의 방문판매 사원은 1만7000여 명에 이른다. 그후 LG생활건강·코리아나화장품·한국화장품 등 대부분의 국내 화장품업체들은 방문판매사원제도를 운영하고 있다.현재 2만여 명의 여성이 화장품 방문판매에 종사하고 있다.

◈야쿠르트 아줌마
한국야쿠르트가 71년 4월 기혼여성들을 대상으로 야쿠르트 판매와 배달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47명이던 야쿠르트 방문판매 사원의 수는 현재 1만3000여 명으로 늘었다.

◈학습지 교사
70년대 ‘공문 수학’이라는 배달 학습지를 가르치던 교사들이 있었다. 80년대 과외가 금지되면서 학습지 시장이 커졌고 이와 함께 학습지 교사들의 활동 영역도 넓어졌다. 현재와 같은 학습지 교사가 등장한 것은 90년대 초반이다. 현재 대교·구몬·한솔·웅진·재능교육 등의 학습지 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교사의 수는 10만여 명 으로 추산된다.

◈보험설계사
보험설계사 제도가 도입된 것은 58년이다. 출퇴근 시간이 자유롭고 노력에 따라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어 기혼 여성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보험 모집에 활기를 띤 90년대 말 보험모집인의 수는 30만 명까지 늘었지만 종신보험 가입률이 높아지면서 최근 3∼4년 사이에 크게 줄어 현재는 13만 5000여 명이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남성들의 참여도 늘어 이들의 비중이 18%를 차지한다.

◈렌털 가전 관리요원
웅진코웨이가 98년 도입한 제도로 각 가정을 돌며 렌털 판매한 정수기 등 가전제품의 필터 관리와 사후 서비스를 해주는 직업이다. 웅진코웨이 ‘코디’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후발주자인 청호나이스 등에서도 비슷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1만7000여 명이 이 일에 종사하고 있다.

◈비정규직 등
대부분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직 신분으로 정규직 월급의 절반 정도를 받는다. 전기나 가스 검침원,텔레마케터,골프장 경기보조원 등이 있으며 이들의 수는 40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여풍당당 여자라서 행복하다
70년대부터 여성 기업인 등장
건설·제조업까지 참여 확대
윤송이씨 같은 스타임원도 나와

‘28세 윤송이(사진)박사 SKT 상무 됐다’‘최연소 여성 임원, SK텔레콤 윤송이 상무’.

2003년 3월 한국은 윤송이라는 젊은 여성을 주목했다.

윤 상무는 서울 과학고를 2년 만에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미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3년6개월 만에 박사를 따낸 천재소녀로 화제가 돼 왔다.

그는 당시 “젊은 여성 박사가 대기업 임원이 됐다고 화제에 오르내리기를 원치 않는다. 사업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개발한 서비스로 고객들에게 인정받을 것”이라며 취임 소감을 밝혔다.
윤 상무는 2000년대 한국 사회의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 남성들의 영역이었던 공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매출 10조원에 육박하는 대기업의 임원으로 발탁됐기 때문이다.

윤 상무처럼 젊고 유능한 여성들이 대기업에 진출하고 있으며 두각을 나타내는 일도 많아졌다. 하지만 임원의 수는 아직 미미하다. 국내 100대 기업 가운데 여성 임원의 수는 2004년 겨우 13명이었다. KT의 이영희ㆍ이후선ㆍ조화준 상무와 LG전자의 김진 상무, SK의 강선희 상무 등이다.

IT업계에는 스타급 여성 기업인이 많은 편이다. IT붐이 정점에 달했던 99년께 버추얼텍 서지현 사장은 안철수ㆍ이재웅씨 등과 겨룰 만한 기업인으로 조명을 받았다. 게임업체 컴투스의 박지영 사장, 디지털 계측기 전문업체인 이지디지털 이영남 대표 등도 IT업계의 유명 인물이다. 제대혈 보관사업과 줄기세포를 이용한 신약 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메디포스트의 양윤선 사장은 바이오업계의 선두주자다. 우성화 사장은 국내 최대 온라인 티켓 예매업체인 티켓링크를 이끌고 있다.

한국에서 여성 기업가가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초부터였다. 구멍가게에서 떡을 팔다 떡 공장을 차린 여사장, 연탄 아궁이를 고치던 솜씨로 곤로(풍로)상을 경영하게 된 여사장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부업으로 출발했다가 기업의 형태로 발전했다. 여성 특유의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 기업을 일으킨 여성도 등장했다. 국제복장학원의 최경자 사장, 하선정 요리학원의 하선정 사장 등을 들 수 있다. 남편 별세 후 남편의 기업을 물려받은 여사장도 나타났다. 작은 비누회사인 애경산업을 굴지의 애경그룹으로 성장시킨 장영신 회장이 대표적이다.

80년대 들어 롯데ㆍ신세계ㆍ현대백화점 등 유통산업 분야에서는 그룹 창업주의 딸이나 며느리가 두각을 나타냈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딸인 신영자(롯데쇼핑 부사장),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막내딸인 이명희(신세계 회장), 현대그룹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셋째 며느리인 우경숙(현대백화점 고문)씨가 그 주인공이다.
여성 기업인은 집계가 시작된 97년 이후 한해도 빠짐없이 그 수가 늘고 있다. 서비스업과 자영업에 치중해 있던 업종도 최근 들어 건설업ㆍ일반 제조업으로 확대되고 있다.

인맥과 학맥이 부족하고 접대와 뒷돈 거래에 능하지 못한 것은 여성 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 부각되는 ‘지식사회ㆍ투명사회’는 여성 기업인들에게 큰 희망의 말이다.

한국여성경제인연합회 정명금 회장은 “여전히 한국은 남성 위주의 사회다. 하지만 달라지고 있다. 여성기업인들이 큰 무대에서 맘껏 역량을 펼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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