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격정과 깨달음을 짧은 언어와 운율로 표현하는 일은 인간 본성에 속한다고 시인들은 흔히 말한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진 시적 표현 중 가장 오래된 양식은 시조다. 신라의 정형시인 향가에 뿌리를 둔 것으로 치면 1000년, 조선 초에 지금과 같은 형식이 완성된 것으로 보면 600~700년의 역사다.
그런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성적으로 네 박자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생체리듬이 육화(肉化)된 게 시조라는 점이다. 서정주의 ‘문둥이’, 조지훈의 ‘승무’ 중 첫 세 연 등 명시(名詩)는 시인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시조의 꼴을 갖추고 있다는 게 그 근거다.
세계적으로 손색 없는 ‘우리 노래’이지만 요즘 시조의 위상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마침 이번 달 최대의 시조시인 단체인 한국시조시인협회가 창립 50돌을 맞는다. 1964년 12월 30일 시조시인협회의 전신인 한국시조작가협회가 55명 회원으로 출발했다. 이를 계기로 현대시조의 어제와 오늘을 짚어 봤다.


◆시조 쓰는 대통령=현대시조의 시작은 1906년이다. 대구 여사라고만 알려진 여성이 쓴 ‘혈죽가’가 매한매일신보에 발표됐다. 본격적인 시조의 현대화는 최남선에 의해서다. 실제로는 111수가 실린 그의 26년 시조집 『백팔번뇌』로 인해 시조가 시조창에서 벗어나 ‘읽히는 문학’으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최남선·이광수 등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계급문학에 맞서 시조를 내세웠다. 문학의 서구화에 대한 반성에서 민족적인 것으로 방향을 돌린 ‘시조부흥운동’이다. (성호경 『시조문학)
비슷한 맥락에서 과거 권력자들은 시조를 애용했다. 빼어난 한시(漢詩) 시인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50년대 말 창경원(지금의 창경궁)에서 전국 시조대회를 열고, 직접 시제(詩題·시의 주제)를 내렸다. 70년대 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조를 쓰자 시조 열풍이 불었다. 당시 최규하 외무장관, 민복기 대법원장, 유진산 신민당수 등 당대의 엘리트들이 시조를 썼다.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60년대부터 시조를 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82년 복역 중이던 청주교도소에서 12수 연시조 ‘옥중 단시’를, 그해 말 미국 망명길에 오르며 ‘인제 가면’이라는 3수 연시조를 썼다.

◆기로에 선 한국시조=그런 흐름 속에 한국시조시인협회는 양적인 면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큼 성장했다. 79년 163명이던 회원 수가 92년 500명, 99년 850명, 2014년 현재 1300명으로 꾸준히 늘었다. 85년 시조시인 한춘섭씨는 8년 준비 끝에 현대시조 1만8000수, 고시조 3600수를 망라한 2000쪽짜리 『한국시조 큰사전』을 펴내기도 했다.
문제는 내실이다. 시조는 ‘오래된 낡은 것’이라는 이미지가 아직도 상당히 퍼져 있다. 전문 연구인력이 크게 부족하다는 얘기도 시조단 내부로부터 나온다. 시조 평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 보니 쓰는 사람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독자도 크게 늘지 않는다는 얘기다.
협회의 제23대 이사장인 시조시인 이우걸씨가 2012년 취임 직후 인산시조평론상을 만든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올해 3회째인 인산평론상은 서강대 박철희 명예교수, 서울대 장경렬 영문과 교수, 엄경희 숭실대 국문과 교수에게 각각 돌아갔다. 시조단 바깥의 시 전문가를 끌어 들이겠다는 의도다.
시조시인인 이지엽 경기대 교수는 “50년간 협회의 외연은 충분히 넓어졌다고 본다. 이제는 정말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는 내실 있는 단체로 거듭나기 위한 제2의 도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64년 협회 창립 발기인이었던 이근배(74) 시인은 “영어 시조를 쓰는 미국 하버드대의 데이비드 매캔 교수처럼 시조를 좋아하는 외국인이 늘고 있다”며 “일본의 하이쿠 만큼은 아니겠지만 국경이라는 둑을 넘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화 정책 입안자들이 영화나 대중음악만 지원할 게 아니라 한국적 정체성과 국격(國格)을 드러내는 시조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우걸 이사장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시조를 좀 더 많이 가르치는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장기적으로 국립시조문학관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