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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의 야구노트] 오빠, 가벼운 배트 써 봐 김태균 깨운 아내의 훈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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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가족이 무심코 던진 말이 전문가의 분석이나 코멘트보다 큰 효과를 발휘할 때도 있다. 김태균은 야구 전문 아나운서 출신인 아내 김석류씨의 한마디를 새겨듣고 올 시즌 초 슬럼프에서 벗어났다. 김석류씨는 김태균에게 가벼운 배트를 쓰라는 조언을 했다. [중앙포토]
김석류

청년은 할아버지를 참 좋아했다. 야구가 뜻대로 되지 않았던 1994년 어느 날, 그는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 아무래도 야구를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자상하기만 했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굳어졌다. “얘야, 우리 가문에는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없단다.”

 할아버지의 따끔한 한 마디가 그를 깨웠다. 마이너리그를 전전했던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이듬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고 마이너리그로 다시 떨어지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 프로야구 콜로라도의 마무리투수 라트로이 호킨스(42) 얘기다.

 호킨스는 지난 9월 28일(LA 다저스전) 메이저리그 통산 1000번째 경기에 출전했다. 현역 투수 중 최다 등판 기록이었다. 빅리그 최고령 투수인 그는 올 시즌 4승3패 23세이브, 평균자책점 3.31을 기록했다. 콜로라도는 그와의 계약을 내년까지 연장했다.

 로빈슨 카노(32·시애틀)는 유명한 ‘파파보이’다. 뉴욕 양키스에서 뛰던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그는 매일같이 아버지 호세 카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저그런 투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을 메이저리그 최고 2루수로 키워냈다.

 “아들아, 서두르지 마라. 넌 데릭 지터가 아니잖니? 누굴 따라하지 말고 네 스타일 대로 해 보렴.” 아버지는 아들의 몸이나 기술이 아닌 마음을 살폈다. 카노는 지난해 말 10년 총액 2억4000만달러(약 2660억원)를 받고 시애틀로 이적했다.

 한화 4번타자 김태균(32)은 올해 5월 중순까지 슬럼프를 겪었다. 그는 복잡한 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부진의 원인을 찾았다. 그럴수록 머릿속은 더 어지러워졌다. 어느 날, 그의 아내 김석류씨가 말했다. “방망이 무게를 줄여보는 게 어때?”

 김태균은 2001년 데뷔 이후 줄곧 920~930g의 방망이를 사용했다. 10년 전 830~840g의 경량 배트가 유행할 때도 그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가벼운 배트를 쓰는 게 싫었다. 김석류씨는 야구 전문 아나운서 출신이지만 야구 기술까지 잘 아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남편을 위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크다. 아내의 말을 듣고 가벼운 방망이로 바꾼 김태균은 출루율 1위(0.463), 타율 2위(0.365)로 시즌을 마쳤다.

 홈런왕 3연패를 달성한 박병호(28·넥센)의 아내 이지윤씨도 내조의 여왕으로 꼽힌다. 여군 장교 출신으로 야구 아나운서로도 일했던 이씨는 ‘만년 유망주’였던 남편에게 “힘들면 그만둬. 내가 먹여 살릴게”라는 대범한 조언을 했다. 남편이 좀 더 편하게 야구를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박병호는 지난해 MVP를 차지한 뒤 “100점 짜리 아내에게 감사한다”는 말로 답했다.

 이승엽(38·삼성)도 오래 전 ‘아내 코치’의 효과를 본 적이 있다. 야구를 전혀 몰랐던 아내 이송정씨가 신혼 시절 “오빠, 밀어쳐”라고 했단다. 홈런 행진을 하다 자신도 모르게 스윙이 커진 이승엽은 아내의 충고를 듣고 어깨를 닫고 공을 끝까지 봤다. “밀어치라”는 말은 중계방송에서도 지겨울 만큼 자주 나온다. 평범한 말에 진심이 담기자 아주 특별해졌다.

 홍성흔(38·두산)은 2010년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뒤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여보, 나 버리지 마”라고 말했다. 시상식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몰라도 그의 뜬금 없는 사랑고백은 참 유쾌했다.

 각 구단의 가을캠프가 11월 말로 끝났다. 12월은 야구규약이 정한 비활동기간이다. 1월 중순부터 스프링캠프가 시작되기 때문에 선수들이 가족과 함께 보낼 시기는 연말뿐이다. 1년 365일 중 200일 이상 집을 비우는 선수들에게는 12월이 ‘가정의 달’이다. 최고의 동료이자 코치인 가족과 함께 하는 귀한 시간이다. 지난 열한 달 동안 못했고, 앞으로 열한 달 동안 못할 가장의 역할을 할 때다.

 유부남만 가정에 충실해야 하는 건 아니다. 지금은 예쁜 가정을 이룬 김병현(35· KIA)은 스물한 살 총각 때 벼랑 끝으로 몰린 적이 있다. 2001년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결정적인 홈런 두 방을 맞았을 때다. 김병현의 어머니는 이역만리에서 홀로 괴로워하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했다.

 “병현아, 밥 많이 먹어라. 그리고 공은 좀 낮게 던져라.”

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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