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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지가 환해지면, 마음도 환해집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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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서울 서남병원에서 치매환자를 대상으로 한 미술치료가 진행되고 있다. 미술치료는 암과 재활의학, 정신건강의학과 등 다양한 의료분야에서 보완요법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사진=신동연 객원기자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움과 자유를 추구한다. 이들이 만나는 접점에 미술이 있다. 정신건강을 위협받는 현대인이 본능처럼 미술을 갈망하고 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색칠놀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미술치료의 영역은 정신질환자부터 암환자까지 점차 넓어지고 있다. 이런 흐름을 타고 최근에는 미술작품과 뇌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다. 미술은 삶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수단이자,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 정신건강을 지켜주는 약과 같다.

몸과 마음의 치유를 원한다면 이 처방전에 주목하자. 미술을 알면 건강이 보인다.

치매·암 환자에게 ‘딱’ … 통증도 줄어

서남병원 치매 노인들이 직접 그린 미술 치료 작품. [사진 서남병원]

의료분야에서 미술은 심신치료와 뇌활동 강화를 위한 보완요법으로 널리 이용된다. 이대목동병원은 지난 9월 여성암 환자에게 미술치료를 시작했다. 20명의 암환자가 격주로 모여 그림을 그리거나, 점토를 빚으며 작품을 만든다. 이대여성암병원 유방암·감상선암센터 임우성 교수는 “미술치료는 환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치료법이며, 우울감이나 암에 대한 공포를 완화하는 데 효과적”이라 말했다.

실제 스웨덴 우메아(Umea)대학 정신의학과 연구팀이 37~69세 여성 유방암 환자 41명을 분석했다. 20명은 미술치료를 받았고, 21명은 받지 않았다. 그 결과 우울감이나 공포, 신체의 고통 인식 정도가 미술치료를 받은 쪽이 더 낮았다. 치료 효과는 4개월 정도 지속됐다. 임우성 교수는 “환자들의 스트레스나 치료에서 오는 통증을 미술치료로 줄였다”고 말했다. 연세대세브란스암병원, 고대안암병원 등 대부분의 큰 병원이 미술치료를 도입한 배경이다.

심리적 지지는 의료분야에서 미술치료를 통해 얻는 강력한 보조효과다. 기존에 치료방법이 기능적인 회복에 집중했다면, 미술은 동기부여를 통해 치료와 약물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서울 서남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박진수(67·가명)씨가 그런 경우다. 올해 1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박씨는 오른쪽 편마비와 함께 언어장애가 찾아왔다. 인지능력은 그대로였지만 표현을 마음껏 하지 못했다. 말수가 줄고, 답답함과 절망감이 쌓이며 우울증을 겪었다. 이런 박씨는 미술치료를 받으며 극적으로 변화했다. 물 먹은 도화지에 파란 물감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바다”라고 표현해 의료진을 놀라게 했다. 물리치료에도 적극 참여하고 성격도 예전보다 밝아졌다. 박씨는 물리치료와 언어치료를 함께 받으며 재활에 매진하고 있다. 서남병원 재활의학과 이주영 교수는 “심리적 지지효과는 기존에 기능적 활동에 국한됐던 재활치료로 얻을 수 없는 미술치료 효과”라고 말했다.

삶에 지친 일반인에게도 도움 커

미술치료는 정신건강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응용된다. 조현병(정신분열증)·우울증·치매 등 거의 모든 범위에 미술치료가 도입됐다. 한림대의대 강동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한창환 교수는 “미술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의식이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중요한 도구”라며 “특히 주의력집중장애(ADHD)를 겪는 아이에게는 각성효과와 창의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정신건강과에서 미술치료는 크게 작품을 만들고, 이 작품을 토대로 상담을 나누는 두 단계로 이뤄진다. 창작활동으로 내면을 드러내고, 상담을 통해 대상자의 무의식을 외부로 표출하게 하면서 의식과 간격을 좁혀나간다. 한창환 교수는 “미술치료를 통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집단상담이나 프로이트의 ‘꿈 분석’과 같이 기존에 정신건강 분야에서 사용한 상담기법과 유사하다”며 “일반인도 집중력 강화나 자아정체성 확립, 자아발견 등에 미술이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도 미술치료가 활용된다. 지난달 판교 환풍구 붕괴사고의 부상자를 대상으로 미술치료를 진행하는 차의과학대 미술치료대학원 김선현(세계미술치료학회 회장)교수는 “생존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마음의 짐 등 의료로 해결하지 못하는 심리적 지지에 미술치료가 응용된다”고 말했다.

뇌·미술 관계 밝히는 신경미학 연구

하지만 미술치료는 약물치료·상담과 병행되기 때문에 객관적인 효과 입증이 어렵다. 최근에는 정신과학과 심리학, 뇌과학이 결합한 ‘신경미학(Neuroaesthetics)' 분야가 생기면서 효과 입증을 시도하고 있다. 미술을 감상하거나, 치료에 활용하는 대상자의 뇌활동이나 신경전달물질을 분석해 미술이 갖는 가치를 새롭게 탐색하는 것이다..

영국 런던대 세미르 제키 교수는 빈센트 반 고흐나 폴 고갱 등 유명화가의 미술작품을 감상한 뒤, 대상자에게 ‘아름다움’ ‘보통’ ‘추함’ 등으로 느낌을 표현하도록 유도하고 뇌 활성도를 관찰했다. 그 결과, 아름답다고 평가했을 때는 뇌 전두엽 중에서도 보상계인 내측안와전두엽이 활성화됐다. 보상계는 도파민 같은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즐거움과 쾌락을 느끼는 뇌의 영역이다. 시각으로 인지된 그림이 사람의 감정이나 심리상태를 좌우하는 뇌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충북대의대 신경정신과 손정우 교수는 “신경미학을 통해 미술이 갖는 효과가 속속 입증되고 있다”며 “이를 통해 미래에는 가벼운 우울증이나 대인관계 등 건강학적 관점에서 미술의 활용범위가 더욱 넓어질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박정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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