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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주권 이양한 한국은 결손 국가” … “냉전시대 독일도 나토에 방위 맡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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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의 대가들은 좀처럼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다. 한국 학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런 관행에서 벗어난 보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한국 진보 학계의 거두인 백낙청(76) 서울대 명예교수와 최장집(71) 고려대 명예교수가 설전을 벌였다. 학술적 언어로 포장됐지만 그 속엔 ‘가시’와 ‘뼈’가 들어 있었다.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안국빌딩 W스테이지에서 열린 ‘문화의 안과 밖’ 강연회에서다. 네이버문화재단이 후원하는 ‘릴레이 강연’의 하나다. 백 교수는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주제로 강연했고, 사회를 맡은 최 교수가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백 교수는 한국 사회가 지닌 주요 문제들의 근원을 ‘분단’에서 찾는 일을 해왔다. 반면 최 교수는 민주주의를 강조해왔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의사가 정당을 통해 제대로 대변되는 정치체제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 두 교수의 시각 차는 1980년대 운동권에서 벌어진 민족해방(NL) 계열과 민중민주(PD) 계열의 대립과 유사한 면이 있다. 우리 사회의 ‘근본 모순’을 NL은 ‘분단’으로, PD는 ‘노동 문제’로 규정했다.

2005년 최 교수는 한 학술대회에서 “통일을 말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질적 성장과 평화 정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학계에서는 백 교수에 대한 우회적 비판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듬해 백 교수는 “분단 현실의 존재를 망각하거나 외면하는 학자가 많다”면서 최 교수의 실명을 거론했다. 이 일은 당시 학계에서 화제가 됐지만 확전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10년 가까이의 세월이 흐른 2014년에 재연된 두 대가의 전쟁. 그 상황을 지면에 옮겨봤다.

“한반도 분단으로 남북 모두 근대성 불완전하게 갖춰?

백 교수는 강연에서 자신의 대표적 이론인 ‘이중과제론’이 만들어진 경위와 그 내용을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이중과제는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이다. 그가 제시한 ‘적응해야 할’ 근대성은 국민국가 수립, 세계 경제에 능동적 참여, 정치적 민주주의, 과학·기술 발전 등이다. ‘극복해야 할’ 과제는 서구중심주의, 선진국의 제국주의적 지배,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착취 등이다. 한국은 근대성을 갖춤과 동시에 근대의 문제들을 해소해야 하는 이중적 과제를 가지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중과제론은 그의 지론인 ‘분단체제론’과 연결돼 있다. 한반도의 분단으로 남북한 모두 근대성을 불완전하게 갖추고 있다는 것이 분단체제론의 핵심이다. 분단 때문에 한국에서도 자주적인 국민국가가 수립되지 않았고, 정치적 민주주의도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강연에서 “분단체제 극복은 근대 적응 노력이 근대 극복의 노력과 합치됨으로써만 가능하다”며 “분단체제 극복은 ‘이중과제’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주장했다.

“분단 상태지만 남한 사회는 근대화 이뤄 선진수준 올라”

최 교수는 “사회자로서 논평 겸 질문을 드리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우선 “근대화의 중요 요소로 ‘민족독립국가’가 제시됐는데, 민족주의적 이념이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고 논평했다.

최 교수는 이어 ‘분단체제론’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지만 남한 사회는 근대화를 꽤 오래전에 완수해 민주화도 되고 선진적인 발전국가의 수준에 올랐다. 한국의 근대화는 문제가 별로 없어 보인다. 따라서 남북한 모두가 근대에 적응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는 것은 현실에서 많이 벗어난 진단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최 교수는 한국이 자주성을 온전히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상적인 국민국가로서의 결함을 갖고 있다는 분단체제론의 핵심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그는 “남한이 전시작전권을 미국에서 넘겨받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 발제문에 들어 있는데, 냉전 시기의 독일이 나토 공동군사체제에 방위를 맡겼다고 해서 불완전한 국가였다고 정의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또 “근대화의 적응과 극복에 시민사회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는데 한국의 현실에서 시민사회가 과연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들 분단 상황과 연결돼 있어”

백 교수는 최 교수의 비판에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우선 “(강연에서) ‘민족독립국가’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국가의 독립이나 민족의 독립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최장집) 선생님이 저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이 드러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백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민족독립국가’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그는 근대의 독립국가를 ‘국민국가’로 표현했다.

근대화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최 선생님은 남한은 근대화가 완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결손 국가’(백 교수가 분단으로 인해 국민국가가 덜 완성된 상태를 일컫는 데 사용하는 개념)이든 아니든 문제가 안 된다고 보는 것 같은데,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들이 대한민국이 갖고 있는 형식상의 결손성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게 내 입장”이라고 말했다.

군사적 자주성과 관련한 최 교수의 비판에도 강하게 응수했다. “군사주권의 문제는 국가의 온전성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다. 집단 안보체제에 참여하는 것과 한국과 미국 같은 양자관계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일방적으로 군사 주권을 이양하는 문제는 질적으로 다르다. 나토와 유럽국 관계와는 구별된다. 평시작전권만 갖고 전시작전권을 안 갖겠다는 군대는 군대라고 하기가 어렵다.”

백 교수는 시민사회 문제와 관련한 최 교수의 지적에 대해서는 “통일의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참여 공간이 넓어지면 주민들의 실질적 요구에 부합하는 통일이 되지 않겠나 하는 이야기를 한 것이지, 오늘날의 정치 현실에서 시민사회의 참여만으로 문제를 해결한다고 말한 바는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최 선생님의 다른 글을 평소에 읽었을 때 시민사회단체들이 정당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깎아내리면서 운동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부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오늘도 그런 생각을 피력하고 있는데, 저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 말이다.”

백 교수의 답변 뒤에 최 교수가 재공격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미 토론이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이상언 기자 joon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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