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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여직원에게 “뚱땡아, 커피 한잔 타와” … 직장 상사, 성희롱에 해당될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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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올 들어 맹렬히 다이어트 중인 회사원 최모(34·여) 대리. 최근 감량 목표를 달성하고 백화점에서 점찍어 뒀던 타이트한 원피스를 구입했다. 다음날 아침 회사에서 만난 부장은 “최 대리, 살 많이 뺐네. 생각보다 몸매 좋은데, 앞으로도 좀 그렇게 입고 다녀”라고 말했다. 최 대리는 불쾌했지만 이런 말도 성희롱이 되는지 고민이다. 과연 이것도 성희롱일까.

 박상숙 성희롱 예방교육 강사는 “여성성을 부각시키는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성희롱에 해당된다”고 했다. 가령 새 스카프를 두른 여직원에게 “스카프를 해서 목이 더 길고 섹시해 보여”라고 하면 성희롱이다. 그냥 “스카프 참 잘 어울려요”라고 하면 괜찮다. 박 강사는 “옷이나 스카프 등 사물에 대한 칭찬은 괜찮지만 특정 신체부위를 함께 거론하면 성희롱에 해당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부하 여직원에게 “야, 뚱땡아 커피 한 잔 타와”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성희롱 소지가 다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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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성희롱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따르면 성희롱 진정 사건 접수는 2004년 4건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해 2006년에는 107건, 지난해엔 241건을 기록했다. 지난해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의 인턴 성추행 사건이 전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 준 데 이어 올해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골프장 여직원을 껴안는 등 성추행을 한 혐의로 고소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성희롱·성추행에 대한 불감증을 드러냈다. “손녀 같아서 그랬다”는 박 전 의장의 해명은 일반인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최근에는 서울시 도로사업소 주무관이 같은 부서 여직원에게 “사랑한다”며 지속적으로 스토킹을 한 혐의를 받는가 하면, 서울대공원 모 과장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여직원에게 “자꾸 술 따라 주면 역사가 이뤄진다. 역사를 만들려고 그러느냐” “어린것들이랑 노니까 좋다” 등의 발언을 해 징계를 받게 됐다.

 과거 여성들은 남성 상사의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참고 넘기는 일이 많았다. 조직에서는 쉬쉬하며 덮고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성희롱과 성추행이 종종 사회 문제가 되곤 한다. 신체적인 성추행뿐 아니라 언어적·시각적인 성희롱도 징계 대상이 되고 있다. 일부에선 “아니, 그것도 성희롱이냐”고 갸웃거리는 이들도 있다.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이들이 많고 애매한 것도 있다. 실제로 이런 행위도 성희롱으로 제재를 받았다.

  #주유소에서 일하는 A씨는 직장의 남자 동료들이 자신을 놓고 하는 이야기를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A씨를 좋아하는 B씨가 어떻게 하면 A씨의 마음을 살까 고민하자 친구들이 “음료에 약을 타 보지 그랬냐”고 했다거나 B씨가 “A는 내 것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성적으로 수치심을 느낀 A씨는 인권위에 성희롱으로 진정했고, 인권위는 “직장에서 특정 여성을 대상으로 성적 언동을 하는 것은 비록 그 여성이 직접적으로 듣지 않았다 해도 직접 들은 것과 마찬가지로 스트레스를 주므로 성희롱 범주에 해당된다”고 판단했다.

 #한 국악단체 과장 A씨는 공연 후 근처 호프집에서 술자리를 가진 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여성 단원 B, C씨를 포함해 남자 단원들까지 모든 단원을 한 번씩 안아 보자며 차례로 껴안았다. 성적인 굴욕감을 느낀 B, C씨는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고, 인권위는 “비록 A씨가 단원들을 격려하고 독려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해도 상대방 의도와 상관없이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으로 성적 굴욕감을 느끼게 됐다면 이는 성희롱에 해당된다”고 판단했다.

 #한 재단의 관리팀장 A씨는 신혼여행을 다녀온 여직원 B씨에게 “신혼여행 선물이 맘에 든다. 다른 남자와 신혼여행 한 번 더 갔다 오라”고 농담을 했다. B씨가 휴가를 신청하자 “스키장은 남편이 아닌 애인과 가는 곳”이라고 했고, 스키니진을 입고 온 B씨에게 “나이트 복장이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이 사건에 대해 “업무 관계에 있는 직원에게 성적인 농담을 주고받는 것에 대한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성적인 농담을 한 것은 상대를 성적인 대상으로 간주하는 성희롱에 해당된다”고 판단했다.

 카카오톡과 같은 스마트폰 메신저를 통해 성희롱을 유발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박 강사는 “메신저는 사진을 보내면 거부할 수도 없는 데다 말보다 쉽게 하는 경향이 있다”며 “증거로도 명백히 남아 성희롱으로 처벌받기 쉽다”고 말했다.

 성희롱과 성추행의 대부분은 회사 내 상사나 고용주에 의해 일어난다. 인사권 등 영향력을 가진 상사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부하 여직원들은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참고 지내다가 결국 소송 등을 통해 회사와 맞서는 길을 택한다. 이는 회사의 대외이미지를 깎아내리고 회사 내 사기 하락 등의 부작용을 낳는다. 강정일 국가인권위원회 전문상담위원은 “성희롱 사건 발생 초기에 회사 측에서 가해자의 충분한 사과와 적절한 중재를 이뤄 냈다면 회사에 더 큰 손해를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희롱 피해자가 반드시 여성 부하직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드물지만 남성 부하직원이 피해를 본 사례도 있다.

 #여성이 사장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 직원 B씨는 사장 A씨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팔짱을 끼거나 하는 행동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퇴사했다. B씨는 인권위에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느꼈다며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두 사람이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인데도 자주 전화하거나 문자·음성메시지를 보내면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압박하는 것은 성희롱에 해당된다”고 판단했다.

 회식자리에서 러브샷을 강권하는 것도 성희롱에 해당한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A씨는 회식자리에서 여직원에게 러브샷을 강권하고 목에 입을 맞추려 했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1차 경고를 받았으며, 또 다른 회식자리에서도 노골적인 성희롱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A씨는 부당해고라며 중앙인사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서울고법은 “A씨가 여러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성적 언행을 계속함으로써 회사 위신을 크게 추락시켰다는 점에서 징계해고는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그렇다면 술자리에서 여성에게 “자, 마시라니까” 하면서 술을 강권하는 건 괜찮을까. 이 역시 성희롱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자제하는 게 좋다. 인권위는 술을 강권한 사례도 성희롱으로 봤다.

법원은 가끔 인권위의 성희롱 판결을 뒤집기도 한다.

 #한 종교단체 모임의 리더인 A씨는 단체 사무국장인 B씨에게 “와 이리 예쁘노?”라며 뺨을 만졌다. 이후 몇 달이 흐른 뒤 다시 같을 일을 반복하자 B씨가 항의했고, A씨는 “와? 삐쳤노?”라고 말했다. 이런 비슷한 일이 계속되자 A씨는 인권위에 진정을 접수했고, 인권위는 이를 성희롱으로 보고 특별인권교육 수강을 권고했다. 하지만 A씨는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에 대해 성희롱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보아 인권위 결정을 취소 판결했다.

 성희롱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우선 피해자의 주관적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 피해자가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느냐’가 가장 큰 기준이 된다. 여기서는 가해자의 의도나 동기는 중요하지 않다. 또 고용상 ‘불이익’을 받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인사나 수당 등 직장 내 불이익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교수가 학점을 낮게 주는 행동도 포함된다. 피해자에게 얼마나 반복적으로 했는지, 여러 사람에게 성희롱을 했는지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전문가들은 성희롱 위험도가 높은 남성들을 왕자형·오지랖형·권력형·터치형과 같이 유형화하기도 한다. 여성이 나를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직장 상사들은 왕자형에 속한다. 성추행 의혹을 받고 사표를 제출한 서울대 수리과학부 K교수도 이런 유형이다. 학생들에게 식사를 제안한 K교수는 이후 술을 먹이며 신체 접촉을 하기 시작하고, 연락을 피하면 “네가 부인보다 좋다”는 문자를 보냈다.

 오지랖이 넓어 이것저것 참견하는 남성들도 여성들에게는 성희롱을 일으킬 가능성이 큰 사람으로 인식된다. 장애인종합복지관을 책임지는 한 관장은 피해 여성이 출산휴가 후 복귀하자 여성의 가슴을 쳐다보며 “젖 많이 짰느냐?” “그거밖에 안 나오느냐”고 물었다가 성희롱으로 인권위 조사를 받았다.

 권력형은 끊이지 않게 성추문을 일으키는 정·재계 인사들이 해당된다. 강시현 새울림교육센터 대표는 “최연희 전 국회의원이 여기자를 성추행했을 당시 ‘남자가 술 먹고 여자 가슴 안 만져 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던 지지자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며 “고위층에서 확인된 남성 위주 사회인식이 2차, 3차 피해를 양산한다”고 말했다.

 터치형은 과도한 스킨십을 하는 남성들을 일컫는다. 박 강사는 “악수를 하면서 어깨를 만지고 그 상태로 10분간 얘기를 하는 직장 상사도 있다”며 “어깨를 꽉 잡는 정도로도 얼마든지 성희롱 가해자로 몰릴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남성에 대한 성희롱도 늘고 있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지난 10여 년간 남성 성희롱 피해자가 전체 5% 수준으로 파악됐다”며 “가부장적 선입견으로 피해 사실을 노출하기 꺼리는 남성의 특성을 감안하면 피해 규모는 더욱 클 것”이라고 말했다. 여직원이 대다수인 직장에서 근무하던 남성이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하기도 했다. 제복을 입어야 하는 직장임에도 가해 여성은 출근할 때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와 남자 무릎에 앉는 등 성희롱을 지속했다. 노동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피해 남성은 “왜 현장에서 ‘싫다’고 말을 못했느냐”는 질문에 “남자가 쪼잔해 보일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결국 해당 여직원이 회사를 그만두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됐다. 장승진 호원대 교수는 “성희롱은 남성과 여성 차이를 떠나 권력 차이로 벌어진다”고 말했다.

강동욱 동국대 법학과 교수는 “성희롱 규제는 누군가를 처벌하기 위한 게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고 강조했다.

[S BOX] 국내 첫 피해자 지금은 …

서울대 화학과 조교 우모(당시 25세)씨는 교수 신모(당시 52세)씨를 상대로 “수차례 뒤에서 포옹하는 자세로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를 거부하자 보복조치로 조교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1994년 1심에서 ‘피해자에게 3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국내 최초로 성희롱 피해자에게 내려진 배상 판결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95년 국내 사법 사상 처음으로 성희롱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여성발전기본법’이 제정됐다. 당시 조교 측 변호를 맡았던 최은순 변호사는 “권력관계로 인한 불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법률이 만들어졌지만 아직 일반인들은 성희롱 하면 성적인 부분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99년에는 남녀고용평등법이 시행되면서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이 실시됐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벌인 여성들은 현재 어떻게 됐을까. 우 조교 사건을 공동 변호한 최일숙 변호사는 “현재 우씨는 학교에 남아 있지 않고 불안정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아직도 성희롱 사건이 피해자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2010년 소송을 통해 대기업으로부터 3400만원의 배상 판결을 받은 이은의(41)씨는 퇴사 후 로스쿨을 졸업한 뒤 올해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이씨는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도 성희롱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우리 문화가 아직도 미흡하다는 점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김민상 기자 step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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