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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안 서울대 박사 ‘프로야구 선수 슬럼프’ 심층연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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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그것은 바람 같은 일이다. 어디서, 왜 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단단한 나무를 쓰러뜨리고 마는 폭풍…. 사람들은 그것을 ‘슬럼프(slump)’라고 부른다. 억대 연봉의 프로야구 선수들도 슬럼프를 겪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대중은 그 고통의 내면을 잘 알지 못한다. 최고의 성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어느 날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추락하고 마는, 그 참혹한 ‘슬럼프’의 늪을 알지 못한다.

 롯데 자이언츠 손아섭(26) 선수 이야기를 해보자. 손 선수는 데뷔 2년 차이던 2008년 타자로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80경기에 출전해 3할3리를 쳤다. 몸값은 뛰고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이듬해 그는 추락했다. 타율이 1할8푼까지 곤두박질쳤다. 하반기엔 2군으로 내려가야 할 정도였다. 손 선수의 회상이다.

 “갑자기 공이 잘 맞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 이전 성적에 자만하지 않았고, 자신도 있었고, 무엇보다 열심히 했거든요. 나중엔 내 실력이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게 아닐까 자책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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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선수는 시즌을 마치고 타격 코치를 찾아갔다. 남들은 슬럼프라고 수군댔지만 극복할 자신이 있었다. 정밀 분석 끝에 원인이 나왔다. 문제는 타격 폼이었다. 손 선수는 타격 폼을 고쳐 잡았고 2010년 시즌에서 3할대로 다시 올라섰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졌다 다시 벗어나는 과정은 어떻게 이뤄질까. 최근 발표된 김수안 서울대 심리학과 박사의 논문 ‘프로야구 선수의 탄력성 연구:역경 극복 과정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그 과정은 ‘위기→원인 분석·대처→극복’ 순으로 정리될 수 있다. 김 박사는 논문에서 6시즌 이상 뛴 프로야구 선수 175명(타자 104명, 투수 71명)의 매 시즌 성적을 분석했다. 또 송진우(48·KBS N 해설위원)·이호준(38·NC 다이노스 선수) 등 전·현직 선수 12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슬럼프의 기준은 야구전문기자와 현직 지도자들의 조언을 받아 전 시즌 대비 타율이 2푼 이상 떨어졌거나 평균 방어율이 1점 이상 상승한 경우로 정했다.

 #위기

 김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슬럼프 횟수나 기간은 선수의 성적과 무관했다. 스타급 선수라고 슬럼프를 덜 겪거나 무명 선수라고 해서 슬럼프를 더 자주 겪는 건 아니었다. 10년간 선수 생활을 한 경우 평균 2.5번의 슬럼프를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타자의 경우 평균 1.3년, 투수의 경우 평균 1.98년씩 슬럼프를 경험했다.

 16년간 평균 방어율이 2.98이었던 김용수 LG 트윈스 전 코치 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선수 생활을 하면서 네 차례의 슬럼프를 겪었다. 특히 허리 통증을 겪던 1992년엔 극심한 슬럼프로 선수 생활에 빨간불이 켜졌다. 꾸준히 치료를 받았지만 5.16까지 치솟은 방어율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김 박사는 “성적이 뛰어난 선수가 슬럼프를 안 겪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라며 “슬럼프를 피하려 하는 것보다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상황 인정과 노력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김 박사는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선수들은 현실을 직시하는 단계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바닥을 찍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회복(Bounce Back)이 시작됐다는 얘기다. 김 박사는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은 자신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은 코치를 따로 찾아가 조언을 받거나 새로운 투구법을 시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변화를 수용했다. 일부 선수는 정신과를 찾기도 했다. 다음은 두 선수의 경험담이다.

 “저를 버렸었어요. 나는 2군 선수다. 2군이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거고, 이곳이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 그렇게 인정을 하고 받아들인 거죠.”(롯데 자이언츠 이용훈 코치)

 “시즌 초반에 무너져서 게임에 못 나가면 선수들은 ‘장난해? 내가 작년에 홈런 30개를 쳤는데 게임을 안 보내?’라는 식으로 분노해요. 그러나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이렇게 과거를 떠올릴 게 아니라 바닥에서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게 더 중요하더라고요.”(NC 다이노스 이호준 선수)

 평균 이상의 성적을 올리는 선수일수록 슬럼프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덜 겪는다는 것도 김 박사의 연구를 통해 확인됐다. 16년간 A급 투수로 활약하다 은퇴한 김용수 전 코치의 경우 슬럼프가 닥쳤을 때 “운동을 하다 보면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일”이라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92년 한때 방어율이 5점대까지 치솟았던 그가 1년 만에 평균 방어율 1.55로 회복한 것도 슬럼프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를 잘 관리했기 때문이었다.

 #극복

 슬럼프를 극복하면 대부분의 선수가 이전 시즌에 비해 성적이 오히려 향상됐다. 김 박사에 따르면 타자의 경우 슬럼프 전 타율의 평균은 0.278이었다. 슬럼프를 겪으며 0.215로 떨어졌다가 극복 이후 0.293으로 올랐다. 투수도 마찬가지였다. 슬럼프 전 투수들의 평균 방어율은 3.31이었는데, 슬럼프 상황에서 6.11로 치솟았다. 하지만 슬럼프를 이겨낸 뒤엔 3.25로 슬럼프 이전보다 더 떨어졌다. 김 박사는 “슬럼프 극복 후 선수들은 성적이 올랐을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긍정적으로 변했다”며 "이러한 심리적 성장은 향후 슬럼프에 대한 완충장치로 작용하게 된다”고 말했다.

 물론 슬럼프는 프로야구 선수에게만 해당 되는 일은 아니다. 일반인들도 누구나 제 뜻대로 일이 되지 않는 ‘삶의 불황(slump)’을 겪곤 한다. 김 박사는 프로야구 선수들의 슬럼프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 슬럼프는 비단 프로야구 선수 등 스타들이 겪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스트레스 상황이나 실적 부진 등도 슬럼프라고 할 수 있어요. 역경이 결국에는 더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슬럼프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S BOX] FA 이후 성적 부진 이유는

심리학은 야구선수들의 심리와 반사작용의 연관관계 등을 연구해 왔다. 예를 들어 빠르게 날아오다 스트라이크존 위쪽으로 솟아오르는 ‘라이징 패스트볼’은 타자의 심리가 만들어낸 착각이라고 심리학은 설명한다. 인간의 눈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르는 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지막 몇㎝ 앞에서 놓친 공의 움직임을 두뇌가 임의의 이미지로 채웠기 때문에 공이 떠오른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자유계약(FA) 선수들의 성적이 계약 전 시즌보다 계약 후 왜 떨어지는지와 같은 경기 외적인 의문에 대해서도 답을 한다. 연구들에 따르면 FA 선수들은 큰돈을 받고 난 뒤 선수들의 동기가 바뀌게 되면서 성적이 떨어지게 된다. 자신들이 좋아서 야구를 하기보다 큰돈을 벌기 위해 야구를 한다고 느끼게 된다는 분석이다. 아울러 심리적 압박이 성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연구하기 위해 선수들을 대상으로 타격훈련 중 딴생각을 하도록 하는 실험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 같은 야구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은 1921년 미국 컬럼비아대의 뉴욕 양키스 타자 베이브 루스 연구에서 시작됐다. 당시 연구진은 베이브 루스의 반응 시간, 기억, 학습 능력을 통해 ‘타격의 비밀’을 밝혀내고자 했다. 38년에는 시카고 컵스가 처음으로 일리노이대의 심리학자 콜먼 그리피스를 스포츠 심리 전문가로 고용했다.

이상화 기자 sh998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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