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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진흥왕부터 간송 전형필까지 … 한국 예술 지켜온 큰나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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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새로 쓰는 예술사
송지원·박남수 외 지음
글항아리, 436쪽
2만6000원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가 있을 뿐.”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1909∼2001)는 700쪽에 이르는 『서양미술사』를 이렇게 시작하고 맺었다. 남과 다르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태도가 오늘날의 미술사를 만들었다는 얘기인데, 이를 위해 예술가들은 얼마나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좌충우돌의 삶을 살았을까. 예술가를 가장 중심에 둔 곰브리치 또한 각 장의 시작을 그 시대를 이끈 이들에 대해 서술하는 데 할애했다.

 창작에 몰두하는 예술가들은 생계를 책임지지 못해 작품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반대로 생활인은 삶을 지탱하느라 예술로부터 멀어진다. 서로 침투되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리는 예술과 생활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바로 예술 후원자(메세나인)다.

 이탈리아에 르네상스를 꽃피운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신라 진흥왕을 시작으로, 고려 최씨 무신정권, 조선 안동 김씨 가문, 일제 강점기 개성 상인과 간송(澗松) 전형필에 이어, 문화대국을 꿈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음악 영재에게 깊은 애정을 보인 박성용 전 금호아시아나 명예회장 같은 기업가가 있었다. 예술 창작자가 아닌 후원자를 통해 신라에서 오늘날까지 2000년 한국 예술사를 읽는 책이다.

 신라 진흥왕은 가야국에서 투항한 우륵을 받아들여 가야금 음악을 꽃피웠다. 경덕왕은 화가 솔거를 후원해 경주 황룡사 노송도 등 걸작의 탄생을 도왔다. 고려 100년을 이끈 무신 정권의 후원으로 팔만대장경, 순청자가 나올 수 있었다. 개성 상인 출신 이홍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평생 모은 유물 4000여 점을 기증했고, 이회림 전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은 고향 개성을 떠나 기업을 일군 인천에 송암미술관을 지어 겸재(謙齋) 정선의 ‘노송영지도’를 비롯한 문화재를 기증했다. 윤장섭 성보실업 대표는 틈틈이 도자를 수집하다가 국보 8점, 보물 46점 등 유물 1만5000점을 보유한 호림박물관을 세웠다. 대기업이 아닌 중견 기업에서 국내 최고급 사립박물관을 세운 사례로 꼽힌다.

 송지원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정병삼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등이 각 장을 나눠 썼다. 한국 메세나 협회 2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책이다. 협회 업적을 드러내기보다 예술 후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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