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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후진타오가 부시 앞에서 두보를 읊은 뜻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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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중국, 당시의 나라
김준연 지음
궁리, 652쪽, 2만8000원

중국 당나라(618~907) 때 창작된 당시(唐詩)는 미당(未堂) 서정주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신부’를 떠올리게 한다. 초록저고리 다홍치마 차림으로 40년인가 50년인가 다소곳하게 신방에 앉아 첫날밤도 치르지 못한 신랑을 기다린 신부. 뒤늦게 이를 보게 된 신랑이 안쓰러운 생각에 어깨를 어루만졌더니 그때야 고운 재가 돼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는 이야기 말이다.

 1000년을 굵어온 아름 등걸 같은 당시도 이제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주저앉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고려대 중문학과 교수인 지은이는 고개를 흔든다. 당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숨 쉬며 왕성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생생한 사례가 있다. 주인공은 후진타오(胡錦濤) 전 중국 국가주석이다. 후 주석은 2006년 4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잇따른 결례에 마음이 상하자 오찬 자리에서 두보의 시 ‘태산을 바라보며(望嶽)’의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중국 간쑤성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 1900년 이곳에서 이백의 시 등 당시를 필사한 ‘당초본시권(唐抄本詩券)’이 발견됐다. [사진 궁리]

 ‘언젠가 반드시 산꼭대기에 올라 뭇 산들이 작은 것을 한 번 내려다보리라(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 불만을 에둘러 표현하면서도 가슴 속에 비수처럼 품은 큰 뜻을 숨기지 않은 내용이다. 후 주석은 2008년 5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베이징을 찾았을 때 이 시가 적힌 액자를 가운데에 두고 회담했다.

 이렇듯 당시는 지도자의 품격으로, 국민의 교양으로, 중국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기제로서 현재에도 당당히 작동하고 있다는 게 지은이의 외침이다. 지난 10년간 중국 땅을 1만2500㎞나 누비며 한시의 현장을 찾아 당시의 역사성·현재성의 동시 확인에 나선 이유다. 이를 담은 한 권의 책은 문학기행을 넘어선다. 역사와 문학의 향기를 되새김질하며 고전시대와 현대의 대화를 시도했다는 게 더욱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중국 후난성(湖南省)에 있는 유명 누각인 악양루를 찾은 필자는 감회에 젖는다. 고교 교과서에 실린 두보의 시 ‘악양루에 오르다(登岳陽樓)’가 떠올라서다. 시를 지금의 말로 옮기면 이렇다. ‘예전부터 동정호에 대해 듣다가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른다. 오나라와 초나라가 동남쪽으로 갈라지고 해와 달이 밤낮으로 떠오른다. 친한 벗에게서는 한 마디 소식도 없고 늙고 병들어 외로운 배만 있다. 전쟁터의 말이 관문을 둔 산 북쪽에 있어 난간에 기대 눈물 콧물 흘린다.’

 천 년도 더 전에 두보가 섰던 현장을 찾은 지은이는 눈에 보이는 장쾌한 자연과 내면에 깃든 깊은 슬픔이 기막히게 어우러지는 이 시의 향기에 취하고 또 취한다. 그러면서 악양루에 마오쩌둥(毛澤東)의 필치로 이 시가 적혀 있음을 확인하곤 묘한 감흥에 빠진다. 고향이 악양루에서 지척인 마오 주석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두보의 시 앞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가 다음 화두다. 혹시 지은이가 당시를 씨줄로, 여행을 날줄로 삼아 역사와의 대화라는 큰 그림 그리기에 나선 건 아닐까.

[S BOX] 둔황 막고굴에서 풀린 이백의 비밀

중국 서부 간쑤성(甘肅省)의 하서회랑에는 서역으로 이어지는 오아시스 도시 둔황(敦煌)이 있다. 한 무제가 서역 진출을 위해 설치해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고리가 됐다. 밤새 철마로 내달려 이곳에 발을 디딘 지은이는 이백의 ‘술을 드리다(將酒歌)’의 한 연을 떠올린다. ‘고상한 음악 맛난 음식 귀할 것 없으니/다만 오래도록 취하고 깨지 않기를 바랄 뿐.’

 글쎄, 음악과 음식은 술과 잘 어울리는데 천하의 술꾼 이백이 왜 이랬을까. 비밀은 1900년에야 풀렸다. ‘고상한 음악 귀한 음식’의 원문은 ‘종고찬옥(鐘鼓饌玉)’으로 알려졌는데, 둔황 막고굴에서 나온 필사본에는 찬옥 대신 ‘옥백(玉帛)’이라고 적혀 있었다. 종고와 옥백은 제후들이 제사 때 쓰는 기물로, 높은 벼슬을 가리키는 비유다. 이백은 ‘까짓 것 벼슬보다 술이 좋잖아’라고 읊었던 것이다. 과연 이백다운 기개가 아닌가.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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