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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작은 물건도 더 단순하고 똑똑하게” … 세계 첫 플라스틱 손잡이 가위로 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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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피스카스가 1967년 선보인 오렌지색 가위(아래). 손잡이가 플라스틱 재질이다. 이전 가위는 손잡이가 황동이었다(위). [사진 피스카스]

‘가위’에도 원조가 있다면 365년 역사를 지닌 핀란드 기업 ‘피스카스’가 만든 가위일 것이다. 피스카스라는 이름은 생소해도 ‘오렌지색 가위’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른다. 피스카스는 1967년 세계 최초로 손잡이가 오렌지색 플라스틱 재질로 된 가위를 만들어 냈다. 그 전까진 다들 무거운 쇠손잡이 가위를 써야만 했다. 피스카스는 이 가위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피스카스에도 ‘가위’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아무리 작은 사물이라도 더 단순하고 똑똑하게 만들 수 있다”는 디자인 철학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기능에 충실한 디자인

 잘 만든 가위 덕분에 피스카스는 오늘날 홈·가든·아웃도어 분야에서 17개 브랜드를 거느린 연매출 1조원대 ‘피스카스 그룹’이 됐다. 다시 가위로 돌아가 보자. 피스카스 가위의 성공비결은 두 가지다. 먼저 전에 없던 화려한 오렌지 색상의 공구는 서랍 속 어디에서나 눈에 잘 띄었다. 다음으로는 가위를 손에 쥐었을 때의 느낌이다.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을 적용해 손에 가위가 착 달라붙는다. 이는 손잡이가 황동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자유자재로 천이나 종이를 자를 수 있다. 가죽을 재단할 때 피스카스 가위를 사용하는 명품 브랜드도 있을 정도다.

 이런 디자인이 가능했던 이유는 피스카스가 바로 ‘도구’라는 본질에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본래 피스카스는 1649년 핀란드 남부 피스카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제철소로 출발했다. 철·구리를 다루던 이곳은 점차 칼·포크·가위부터 농기구까지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피스카스는 어떻게 하면 최소의 힘으로 최대의 결과를 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핀란드에서 가장 먼저 증기 기관을 선보인 곳도 피스카스다.

형태가 곧 디자인인 알바 알토 꽃병(위). 핀란드 유리 공예의 대가 오이바 토이카가 디자인한 ‘새’ 시리즈(아래). 모두 이딸라에서 수작업으로 생산된다. [사진 이딸라]

 ◆일관된 디자인 정책

 핀란드에선 피스카스 하면 다들 오렌지색과 검은색을 떠올린다. 피스카스에서 나오는 가위·도끼 등의 연장은 모두 이 두 가지 색상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피스카스 오렌지’라는 고유 색상이 등록돼 있을 정도다. 이렇게 일관된 색상을 고수했을 때의 장점은 소비자에게 항상 새 제품 같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브랜드의 다른 제품을 접했을 때 친숙함을 느끼도록 도와준다.

 피스카스가 2007년 핀란드 리빙 브랜드 이딸라 그룹을 인수하기로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881년 유리 공방에서 출발한 ‘이딸라’는 형태·색깔·무늬를 통해 일관된 디자인 정책을 펼쳤다. 이딸라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제품이 바로 핀란드 건축가 알바 알토가 1936년에 만든 꽃병이다. 핀란드 호수 둘레를 본떠 곡선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이 꽃병은 오늘날 형태는 똑같지만 다양한 크기와 색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때로는 색깔을 통해 일관성을 유지할 수도 있다. “색깔이 유일한 장식적 요소”라고 선언한 핀란드 디자이너 카이 프랑크가 만들어낸 이딸라의 ‘떼에마’ 식기 세트가 그렇다.

 핀란드 알토대 방문교수를 지낸 이건표 KAIST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는 “한국 기업의 경우 브랜드 로고를 떼면 어느 기업 제품인지 알아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피스카스나 이딸라는 상표가 없어도 색깔이나 형태를 통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디자인의 일관성을 의식하고 제품을 만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장인정신에 대한 고집

 이딸라의 디자인 디렉터 하리 코스키넨은 “ 북유럽 디자인이 쏟아지고 있지만 우리는 ‘견고하고 오래가는 제품’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고 말한다. 그는 알바 알토가 만든 꽃병을 예로 들었다. 이 꽃병은 장인들이 직접 입으로 유리를 불어 만든다. 약 7명의 장인이 30시간을 공들여야 마침내 1개의 꽃병이 완성된다. 피스카스가 각종 연장을 만드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도면을 통해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면 이를 모형으로 만든다. 수년 동안 수십만 번의 실험을 거쳐서 성능이 입증돼야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진다.

피스카스 그룹 파이비 팔톨라페콜 부사장(왼쪽)과 이딸라 디자인 디렉터 하리 코스키넨(오른쪽).

 2000년대 들어 피스카스가 활발하게 인수한 기업들 역시 오랜 역사와 장인정신을 자랑하는 곳들이다. 스웨덴 도자기 브랜드 ‘로스트란드’는 1726년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핀란드 전통 식기인 ‘아라비아’는 141년 됐다. 2013년에 인수한 덴마크 도자기 브랜드 ‘로얄 코펜하겐’은 239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제품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면서 장인정신까지 고집하는 제품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도 손색이 없다. 파이비 팔톨라페콜 피스카스 그룹 부사장은 “값싼 소품을 사서 자주 바꾸기보다 견고한 제품들로만 최소한의 소비를 하려는 욕구가 늘고 있다”며 “오래가는 제품을 세심하게 선택하는 게 합리적인 소비”라고 말했다.

[S BOX] 건축가·디자이너의 산실

핀란드에서 내로라하는 건축가·디자이너는 피스카스·이딸라와 작품을 만들었다.

 핀란드 지폐에 얼굴이 새겨질 정도로 핀란드에서 사랑받는 건축가 알바 알토는 1936년 이딸라와 곡선 형태의 꽃병을 만들었다. 알바 알토는 좋은 디자인은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같은 형태로 이딸라에서 유리 재질의 캔들 홀더와 스테인리스·오크 재질의 접시가 나와 있다.

피스카스는 올라비 린덴의 작품으로 권위있는 디자인 상인 독일 레드닷 어워드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다. 피스카스 수석 디자이너를 지낸 린덴은 피스카스에서 가장 잘 팔리는 정원용 전지 가위를 만들었다. “모든 제품을 더 좋게(better)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핀란드 디자이너 카이 프랑크는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북유럽 디자인 체계를 확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50년대에 이딸라·아라비아와 손잡고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한 식기 세트를 선보였다. 2012년부터 이딸라 디자인 디렉터로 있는 하리 코스키넨이 올해 ‘카이 프랑크 디자인상’ 수상자다.

 이딸라는 내년까지 한국에 백화점·프리미엄 아울렛 등 10개 이상의 단독 브랜드 매장을 열 계획이다.

위문희 기자 moonbrigh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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