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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옛 디자인이 주는 느슨한 쾌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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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4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의 벨기에관은 이삼십 호 안팎의 작은 모노톤 회화들로만 메워졌다. 세계 첨단 미술의 현장인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엷은 회색 계열의 붓 터치로 인물 초상이라는 너무도 익숙한 주제를 잔잔하고 단순하게 그려냄으로써 회화성의 본질에 대한 예민한 탐구를 보여준 작가는 룩 티만스였다.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가 배출한 스타 아티스트로 급부상하며 그 뒤 서구 화단 회화에의 복귀 돌풍을 몰고 왔다.

▶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

21세기라는 새로운 밀레니엄의 문턱에 들어섰을 때, 미술계에서도 다가올 시대의 변화와 그 흐름에 대해 온갖 기대와 예측이 이루어졌었다. 그런데 이후 약 5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상당히 흥미롭게 보아야 할 부분은 미술계 전반을 감싸는 보수와 복고의 경향이다. 테크놀로지와 정보의 시대에 미술가를 사로잡고 관객과 고객을 사로잡은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소박하고 섬세하며 아날로그적인 재료와 이미지들이다. 물론 한편의 많은 작가가 여전히 새로운 첨단 재료를 실험하며 장르를 개척해 나가고 있지만 미술이나 디자인에 있어 지난 몇 년간, 그리고 지금 현재를 대변하는 트렌드와 시장의 중심에는 복고 모드가 있다.

앞서 말한 룩 티만스 같은 작가 이외에도 반 덴 브룩 등의 유럽 작가들이 표현주의 회화의 순수성을 발췌하는 '손맛'의 감각적인 작품들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특히 옛 동독 지역 화가들의 급부상은 한때 전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회화'의 부활에 불을 댕겼다. 이 동독 지역 출신 작가들의 작품 역시 세련미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순박하고 묵직한 느낌의 회화들이다. 국내 화단에서도 형상성과 회화 고유의 맛을 추구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전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아마도 차가움, 금속성, 기계적인 움직임, 속도 등에 지친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이처럼 '느린' 미술들에 대한 향수를 더욱 부채질했을 것이다.

디자인에서 복고주의 경향은 더욱 뚜렷하다. 특히 가구 디자인을 보면 장 프루베, 샬럿 페리앙 등 1940, 50년대 서구의 유명 디자이너들에 의해 제작된 중고 가구들이 '20세기 디자인'이라는 카테고리를 배경으로 세계 유명 옥션에서 수만 달러, 수십만 달러를 호가하며 팔리고 있다. 세련된 곡선과 구성주의적 매력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그 시대의 가구는 더 이상 생활 용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술 작품처럼 소장의 가치를 지닌 컬렉터스 아이템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아파트 공간, 레스토랑, 커피숍 내부 등 주위 도처에서도 그 시대의 가구, 실내 디자인이 넘칠 듯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남산 길 기슭의 허름한 터전이었던 곳에 최근 노출 콘크리트와 유리를 주자재로 하여 지은 세련된 레스토랑 건물 하나가 있다. 며칠 전 한산한 일요일 오후 근처에 차를 타고 지나다 호기심에 건축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길 건너편 푸른 숲의 전경을 끌어들이는 유리창의 창틀 디자인은 우리의 옛 조각보 혹은 폴 클레의 구성 화면을 닮아 있었고, 배치된 소파와 테이블은 40, 50년대 모드 즉 '20세기 디자인'이었다. 건물을 들어설 때 받았던 차가운 느낌은 정감 어린 형태의 창틀과 그 너머의 자연, 그리고 따뜻한 느낌의 엷은 회색 펠트 소파를 보는 순간 느긋한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주문해 마신 에스프레소 향의 여운조차도 훨씬 길게 여겨진 것은 그냥 그 자리에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게 만든 디자인적 분위기의 힘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옛 디자인이 주는 묘한 느슨함과 친숙함, 그리고 동시에 역설적으로 느끼게 되는 신선한 쾌감이 바로 현대의 삶 속에서 복고주의가 사랑받게 되는 핵심적인 이유가 아닐까.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