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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권 브라운대 명예교수 & 김기현 서울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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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환영
김환영 기자 중앙일보 실장
김재권 교수(오른쪽)가 철학으로 전공을 바꾼 계기 중 하나는 조지 마이로라는 선배를 만난 것이다. 실존주의에 대해 토론했는데 철학도인 마이로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김 교수는 “생존을 위해” 철학도가 됐다. [오종택 기자]

인간의 마음은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항상 신비롭게 느껴진다. 온갖 감각의 파노라마가 마음을 둘러싸고 연출된다. 마음은 복잡한 문제가 풀리고, 창의성이 드러나고, 미적·예술적 감성이 녹아나는 현장이기도 하다. 마음의 신비를 풀기 위해, 또 과학이 마음의 신비를 어디까지 파헤쳤는가를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 철학자들은 부단히 노력한다.

“철학의 사명은 철학자 배출 아니라 시민사회 교육”

김재권(80) 브라운대 명예교수는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심리철학 분야에서 명실상부한 세계적 대가다. 미국의 철학자들이 그의 논문과 책을 철학적 글쓰기의 모범으로 추천할 정도다. 수려하고도 명료한 문체로 유명하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했으나 미국 정부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 간 후 철학의 엄밀성에 매료돼 철학자가 됐다. 동양인 중에서 처음으로 미국철학회장을 역임하고, 미국학술원 정회원이 됐다. 미국 미시간대를 거쳐 브라운대에서 30년을 봉직하고 은퇴했다. 경암학술상을 받기 위해 내한한 김재권 교수를 서울대 철학과 김기현(55) 교수가 10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두가헌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김기현 교수=50여 년에 걸친 교수 생활을 뒤로 하고 은퇴했는데 소감은.

 김재권 교수=은퇴는 자유와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학교에서 가르칠 때에는 일요일만 해도 월요일 수업 준비를 해야 했다. 은퇴 후 생활은 토요일이 매일 계속되는 것과 같다. 특히 젊은 시절처럼 읽고 싶은 문학 작품과 시를 읽을 수 있어서 좋다.

 김기현=한때 시인이 되려는 꿈을 지닌 불문학도였는데.

 김재권=중학생 때부터 작가가 되려고 했다. 그래서 불문학과에 입학했는데 미국으로 유학 간 다음에도 1년 동안 불문학을 전공했다. 미국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는 것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증거에 입각해 중요한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철학에 끌리게 돼 철학 전공으로 바꿨다.

 김기현=문학과 철학은 둘 다 인문학이지만 정반대라고도 볼 수 있다. 의외의 진로 전환이다.

 김재권=사실 나는 불문학 중에서도 프랑스 실존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사르트르·카뮈 같은 작가들은 매우 철학적이다. 분석철학으로 가는 중간 단계가 실존주의였던 셈이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도약과 전환을 항상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우연에 의해 발생하는 일도 있다. 내가 과학철학에 관심을 같게 된 것은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에서 카를 헴펠(1905~97) 교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놀라운 철학자, 놀라운 사람이었다. 지극히 겸손하기도 한 전형적인 유럽 신사였다.

 김기현=철학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철학 하면 ‘운명철학관’이나 명상을 연상하기도 한다.

 김재권=맞는 말이다. 미시간대에 재직할 때 형이상학을 가르쳤는데 ‘앤아버 형이상학 스쿨’이라는 데서 ‘함께 일해보자’고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명상·선불교와 관련된 단체였다.

 유명한 군인이나 기업인들이 은퇴하면서 ‘나의 국방 철학’ ‘나의 비즈니스 철학’ 같은 제목으로 자서전을 내기도 한다. 이처럼 철학이라는 말에는 다양한 용도가 있다. 이러한 여러 모습 또한 철학이 지닌 매력의 일부분이다.

 일반인들은 철학에 대해 정반대 되는 두 관점을 믿는 경향이 있다. ‘철학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와 ‘철학은 뭐든지 바라는 대로 증명할 수 있다’이다. 철학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고 본다. 증명할 수 없는 게 더 많다. 그래서 철학에서는 겸허함이 필요하며 동시에 허무주의적인 태도도 피해야 한다.

 물론 내게 철학은 이성에 입각한 진지한 탐구다. 철학자들은 합리적인 비판의 대상이기도 하고 주체이기도 하다. 그러한 활동의 목표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라는 점에서 철학은 과학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김기현=과학을 포함해 모든 지성적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김재권=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윤리학이다. ‘우리에게 좋은 것은 무엇인가’ ‘훌륭한 삶을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같은 규범적인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답보다는 선택을 해야 한다. 윤리학은 이미 존재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학문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진리가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일부 과학자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그들은 철학적 사고를 한다. 아인슈타인, 에어빈 슈뢰딩거 같은 과학자들은 철학자들과 같은 문제로 고심했다.

 김기현=과학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확장하며 진보한다. 한데 과학은 그 출발선상에서 지식이나 시간·공간, 인과관계 같은 개념에 대해 일단 기본적인 가정을 해야 한다. 과학 연구활동을 진행하면 할수록 기본 가정에 개념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그때 과학자들은 철학이 필요하다. 철학은 과학의 기본 가정이 되고 있는 개념에 대해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킴으로써 과학에 공헌할 수 있다. 심리철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관한 과학은 결국 심리철학과 만나게 돼 있다.

 김재권=의식(consciousness)에 대한 심리철학의 관심은 뇌를 다루는 신경과학(neuroscience)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된다. “의식이 없다면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후에 화장하는 경우가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을 화장하지는 않는다. 차이가 뭔가. 의식이다. 죽은 사람은 의식이 없고 살아 있는 사람은 있다. 우리는 개나 고양이를 걱정하지만 의자나 책상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의식이 있는 대상이냐 아니냐가 차이다.

 한데 신경과학은 의식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신경과학자의 존재론에는 의식이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인간 행동을 설명할 때 의식은 변수가 아니다. 그렇다고 철학적인 설명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설명이 없을 수도 있다. 설명이 있다고 해도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일 수도 있다. 철학 고유의 특별한 통찰(insight)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철학자의 역할은 이러한 문제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문제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돼 있으며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지 또 없는지에 대해 말하는 게 철학자다.

 김기현=과학자들은 간혹 그들이 실험을 통해 발견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과장할 때가 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과학적 발견의 함의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게 필요한 경우가 있다.

 김재권=영국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이 좋은 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은 곧 뇌다”라고 주장했다.

 김기현=김재권 교수는 정신현상을 물리현상에 귀속시키는 물리주의자(physicalist) 중에서도 강경한 입장으로 알려졌는데, 인간의 정신을 의식으로 접근한다고 하니 놀랍다. 마음과 신체는 다르다는 심신이원론을 연상시킨다.

 김재권=내가 물리주의자인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물질의 배열에 달려 있다는 의미에서다. 세상에서 모든 물질이 사라진다면 시공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의식이 실재한다면, 의식은 물질세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김기현=철학은 대학에서 비판적·분석적 사고를 교육하고 있다. 큰 공헌이다. 기업가가 되건 과학자가 되건 사고하는 법은 삶의 기초다. 철학은 성숙한 시민사회의 발전을 위해 항상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김재권=전적으로 동의한다. 철학 교수의 사명은, 학생들을 그들의 삶과 세상의 이슈에 대해 엄격한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시민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을 더 많이 배출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철학 교육을 하는 게 철학자들의 사명이다.

 내가 가르친 학부 강의의 경우 40~50명 중 10명가량만이 철학과 학생들이다. 나머지는 영문과·역사학과·공대 등 전공이 다양했다. 일반 교양 교육(liberal arts education)이 좋은 점은 훗날 법률가·기업인·엔지니어·의사가 될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문명의 발달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만난 사람=김환영 논설위원

[인터뷰 후기] 문학도 심성 간직한 철학자

김재권 교수는 어린이 같기도 하고 시인 같기도 한 심성을 지닌 노 철학자였다. 질문에 대해 재미있는 대답이 생각나면 우선 소녀처럼 수줍은 웃음소리를 냈다.

 - 철학자로서 들어본 가장 멍청한 말은.

 “철학자들이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 온갖 종류의 아이디어가 저절로 샘솟는다는 것이다. 철학자들도 열심히 노력한다.”

 - 플라톤의 철인왕(哲人王·philosopher king)은 현실성 있는 구상인가.

 “철학이 과학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철학이 과학의 시녀라는 인식도 있다. 두 관점 모두 어떤 면에서는 철학을 지적인 활동으로부터 분리한다고 본다. 양쪽 다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겠지만 현실을 왜곡한다고 본다.”

 - 철학자가 되려면 지능지수가 매우 높아야 하는가.

 “GRE(Graduate Record Examination·대학원 입학을 위한 수능시험) 점수상으로 보면 철학과 대학원생들은 수리 분야에서 수학과 학생들 다음으로 높다. 언어 점수는 최고다. 하지만 무슨 일이건 어느 정도의 지능이 필요할 뿐이다. 철학이라고 해서 다른 분야보다 머리가 더 좋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 마지막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게 있다면.

 “50년 동안 철학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철학이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게 있어서 너무 기쁘다. 또 내가 철학에 몸담을 수 있었다는 게 기쁘다. 철학은 인간에게 멋지고 신나는 모험이요 여정이다.”

김재권 명예교수는 …

서울대 문리대 수석으로 입학해 2학년 재학 중이던 1955년 한·미장학위원회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다트머스대로 유학을 떠났다. 미시간대·브라운대에서 가르쳤다. 미국철학회 중부지역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심리철학』 『수반과 마음』 『물리계 내에서의 마음』 등이 있다.

김기현 교수는 …

연구 분야는 분석철학·심리철학·현대인식론이다. 미국 애리조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오클라호마대·서울시립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에 부임했다. 세계철학대회(2008년) 한국조직위원회 사무총장, 한국인지과학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현대인식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