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론

X파일 관가백추도

중앙일보

입력 2005.08.04 20:54

업데이트 2005.08.05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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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도리란 큰 지혜이지만 술수는 잔꾀에 불과하다. 도리는 자연이자 규율이고, 술수는 기교이자 수단이다. 큰 도리에는 술수가 없다. 다시 말해 도로써 일을 행하는 사람은 머리를 짜며 눈동자를 굴리거나 온갖 수단을 부려 계략을 꾸미지 않아도 된다. 행함과 행하지 않음, 말함과 말하지 않음에 도가 있으면, 위기에 봉착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고정일 동서문화사 발행인

중국 역사의 국태민안 3대 성세(盛世)─서한 문경(文景)의 치(治), 당대 정관(貞觀)의 치, 그리고 청대 강건성세(康乾盛世)가 바로 그것이다. 강건성세는 강희.옹정.건륭 세 황제의 통치 시기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의 미래는 강희.옹정.건륭 세 성군이 남긴 선물"이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강희제 말년에 '관가백추도' 사건이 일어났다. 이부(吏部) 기밀문서 담당관 임백안이 정.재계 인물들의 비행을 녹취해 빼돌려 숨겨놓고 고관들 협박에 사용한 관가백추도. 대권후보 황자(皇子)들은 이것을 손에 넣어 황제 자리 쟁탈전 무기로 쓰려 혈안이 됐다. 그러자 넷째 황자 윤진이 그 X파일 상자들을 찾아내 불태워버리고 임백안을 능지처참한다.

"관가백추도를 공개하면 나라의 체통이 무너지고 대혼란에 빠질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당장 얻는 것보다 두고두고 잃는 것이 더 많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 후환을 뿌리째 뽑아버린다. 모두 반성하고 나라를 위해 진력하자." 강희는 처음에 역정을 냈으나 곧 진정하고 윤진의 깊은 뜻을 헤아려 기뻐하며 그에게 후사를 맡겼다. 그가 중국 역사상 최강의 국가 기틀을 세우고 나라 재정을 일으킨 서릿발 현제 옹정이다.

민주화 투쟁 대통령들은 몽매에도 그리던 정권을 손에 쥐자 도취 자만해 깨고 부수고 편가르기에 바빴다. 그들의 증오와 분노.오기에 찬 인사와 정책은 자책골이 되어 만사가 꼬이고 설키기만 했다.

권력을 장악하고 나면 그걸 더욱 강화하려고 매달리는 게 권력의 속성이라던가. 선과 악의 대립인 것처럼 논의구도를 짜놓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끔 분위기를 몰고가는 통치. 아도르노가 갈파한 대로 미디어 시대는 특정 이미지의 반복주입으로 사고작용을 정지시킨다. 이는 곧 대중을 몽매화하는 반지성적 '영상테러'로, 단기간에 세상을 뒤집는 효과를 몰고 온다. 조지 오웰 또한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미래를 지배하는 자가 현재를 지배한다"고 했다. 과거를 지배한다는 것은 집단적 이익에 따라 기억을 선별.관리.통제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과거 청산은 그 시대가 남긴 상처만 계속 짓이기는 일방적 심판이 아니다. 그 시대를 성찰하고 모두가 불행했던 시대의 당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분노와 한을 삼키고 용서와 화해로 국력을 한 데 모아 '세계적 거인'으로 우뚝 선 만델라의 지도력을 떠올려 본다.

안기부 X파일 사건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불법 도청, 개인 프라이버시, 국민 알 권리, 이를 빙자한 여야의 당리당략, 거기에 도청 사회를 부추기듯 일부 방송매체와 시민단체들이 열을 올리고 있다. 녹취록 변조 의혹과 음모론, 반복되는 들춰내기, 실정(失政) 떠넘기기까지 이제 국민은 혼란스럽고 지겹다. 이는 국민적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불법 도청 테이프의 내용을 공개하자는 쪽으로 흘러가는 분위기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게 과연 올바른 방향인가. 불법은 불법을, 보복은 보복을 낳을 뿐이다. 소모적 논란의 와중에 나라의 체통은 무너져 가고 국가경제력은 아시아 최하위로 뒷걸음치고 있다.

정략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관가백추도를 손에 넣고도 스스로 불사른 윤진. 그의 용단은 200여 년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술수를 취할 것인가, 도리를 취할 것인가.

고정일 동서문화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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