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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무한경쟁 시대의 진짜 승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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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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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풍경1 : 서래마을의 한 카페. 입구에는 ‘음악감상실’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출입문을 연 뒤 깜짝 놀랐습니다. 카페 사방 벽면에 LP음반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습니다. “우와~, 아직도 이런 곳이 있었네.” 저희 일행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둘러보니 옛날부터 있던 음악감상실이 아니었습니다. 새로 생긴 곳이더군요. 실내 인테리어는 깔끔하고 모던했습니다. 정겹지만 칙칙한 느낌의 옛날식 음악감상실이 아니더군요. 한쪽 벽에는 ‘추억의 명반’ 앨범 재킷이 빔 프로젝터 영상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탁자 위에 메모지도 있더군요. 잠시 후 큼직한 스피커를 통해 신청곡이 흘러나왔습니다.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그건 추억 속 옛상품을 되새김질하는 고루한 느낌과 달랐습니다. 거리에 즐비한 요즘 커피숍에서 맛볼 수 없는 깊은 맛이 있더군요. 한참 생각했습니다. 그게 뭘까. 무엇이 그런 맛을 주는 걸까.

  그건 ‘틈’이었습니다. 아날로그적 소비 방식에는 곳곳에 틈이 있습니다. 신청한 노래의 선율에 젖고, 가사에 젖고, 사색에 젖을 수 있는 틈 말입니다. 2014년의 음악감상실, 그 경쟁력은 그런 ‘생각의 공터’였습니다.

  #풍경2 : 독일 뮌스터는 ‘자전거 도시’입니다. 도시 곳곳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깔려 있습니다. 총연장이 무려 293㎞나 됩니다. 뮌스터에 갔다가 눈길을 확 끄는 포스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깔끔한 양복 차림에 넥타이를 맨 회사원, 정장을 한 직장 여성이 자전거로 출근하는 사진이었습니다. 아래에 적힌 문구가 기발했습니다. ‘Modern Working(모던 워킹)’. 포스터 앞에 섰더니 ‘나도 모던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궁금했습니다. 저게 왜 모던하고 세련된 것일까. 포스터의 주인공은 최첨단 디자인의 고성능 스포츠카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날로그 방식의 평범한 자전거였습니다. 저는 거기서 ‘틈’을 봤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모던함은 ‘생각의 공터’와 연결되더군요. 그런 공터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빨리 달리기’에만 매달리지 말고, 깊이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보라고. 그게 바로 ‘깊이 달리기’라고 말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빨리 변합니다. 마치 컨베이어벨트 같습니다. 정신없이 돌아갑니다. 계속해서 발을 내딛지 않으면 금방 뒤로 자빠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앞만 보고 달립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기업에서도 ‘빨리 달리기’를 요구합니다. 요즘 대학가에선 문(文)·사(史)·철(哲)이 찬밥 신세입니다. 신입 사원을 채용하는 회사들은 당장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달릴 수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대학생들은 그런 스펙을 갖추느라 더 빨리 달립니다.

  그 와중에 우리 사회는 ‘진짜 승부수’를 놓치고 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세상을 ‘빨리 달리기’만으로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그 어마어마한 변화를 과연 속도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고요? ‘빨리 달리기’를 통해선 세상을 뚫는 눈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읽어내는 눈을 키울 수가 없습니다. 통찰의 눈이 있어야 변화의 방향을 읽을 수 있습니다. 먼저 나를 뚫고, 그 눈으로 사람을 뚫고, 다시 그 눈으로 세상을 뚫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깊이 달리기’가 필요합니다.

  대한민국 대학들의 자화상을 보세요. ‘빨리 달리기’에 도움이 되는 강의와 동아리는 학생들이 우르르 몰립니다. 반면 ‘깊이 달리기’를 위한 강의는 폐강되고, 동아리는 문을 닫기 일쑤입니다. 공부도, 스펙도, 취미도 이제 컨베이어벨트 위에서만 돌아갑니다. 다들 두려워하는 무한경쟁 시대. 그걸 헤쳐가는 진짜 승부수가 뭘까요. ‘빨리 달리기’일까요, 아니면 ‘깊이 달리기’일까요.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