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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합 부르는 턴키·최저가낙찰 … “정부가 판 깔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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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MB정부는 임기 내에 4대 강 사업을 끝내기 위해 170개 공구를 무더기로 발주하고 최저가낙찰제를 적용했다. 건설사 담합을 조장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사업에 참여한 건설업체는 지금까지 2차례에 걸쳐 총 1267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사진은 2011년 10월 경남 창녕 함안보 공사 현장. [중앙포토]

“짜고 친 건 인정하지만 판은 정부가 깔지 않았나.”

 4대 강 사업을 시작으로 최근 불거지고 있는 건설사 담합 사건에 대한 건설업계의 하소연이다. 담합을 한 건 사실이지만 정부가 그럴 수밖에 없도록 몰아갔다는 얘기다. 4대 강 사업이나 철도 공사 같은 대형 공공공사 발주엔 공통점이 있다. 모두 ‘턴키’(설계·시공 일괄 입찰)와 최저가 낙찰제, 분할 발주(1개 사업이지만 공구별로 잘게 쪼개 동시 발주) 방식으로 이뤄진다. 턴키는 전체 공사비의 3~4%에 달하는 설계 비용을 업체가 우선 부담한 뒤 공사비를 산정해 입찰에 들어가는 형태다. 4대 강 사업처럼 규모가 큰 공공공사는 설계비만 수백억원에 이른다. 중견 업체의 1년 순이익과 맞먹는 액수다. 그러다 보니 대개 대형 업체 위주로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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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입찰에 탈락해도 이 돈은 건질 수 없다. 앉은 채로 고스란히 날릴 수 있다. 게다가 낙찰자는 최저가로 정한다. 공사비를 가장 적게 써 내는 업체에 일감을 주는 식이다. 여기에 임기 내에 공사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1개 사업장을 여러 개의 공구로 나눠 동시 발주한다. 공사 기간을 줄이기 위한 목적인데, 4대 강 사업은 2009년 6월 15개 공구가, 호남고속철도는 같은 해 9월과 11월 각각 5개, 10개 공구가 동시에 발주했다.

 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업체는 한정돼 있는데 여러 공구를 동시에 발주하면서 최저가 낙찰을 제시하니 건설사 입장에선 자연스럽게 담합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업체가 어떤 공구에 입찰할지 모르는 마당에 비싼 설계비를 들여 경쟁을 하긴 어려웠다. 해서 업체들이 짜낸 묘안은 ‘경쟁’ 대신 ‘공구 나누기’였다. MB 정부 시절인 2008년~2009년 집중 발주된 대형 공공공사에서 주로 담합이 적발된 건 이 때문이다.

 4대 강·호남고속철도뿐만 아니다. 과거 경인아라뱃길(2009년)·인천도시철도(2009년)·대구도시철도(2008년)·부산지하철(2008년)·서울지하철9호선(2009년)이 모두 조기 완공을 위해 분할 발주했다. 게다가 업체당 1개 공구만 수주할 수 있게 했다. 한 대형 업체 임원은 “사실상 정부가 담합을 유도한 면이 있다”며 “그런데 이제 와서 과징금에다 검찰 수사, 입찰 제한, 민사소송(발주처의 손해배상) 등 4중 제재를 가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담합 사실이 확인되면 업체들은 1~2년간은 공공공사 입찰이 제한된다. 입찰로 먹고 사는 업체들의 특성상 사실상 ‘영업정지’와 같은 셈이다. 더욱이 이로 인해 국내 건설사의 해외건설 수주까지 차질을 빚게 되면 국가적으로도 손실이다. 그렇다고 4대 강 사업 등을 통해 돈을 많이 번 것도 아니다. A사의 한 임원은 “MB가 워낙 건설업을 잘 알다 보니 공사 원가를 확 낮췄다”며 “참여업체 모두 (4대 강 사업으로) 손해를 봤고 증빙자료까지 내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차제에 중복 제제와 논란이 많은 발주 형태를 손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최민수 연구위원은 “중복처벌은 국가 경제 손실과 기업 경쟁력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최저가 낙찰제를 보완할 수 있는 종합심사낙찰제나, 턴키를 대체할 수 있는 확정가격 최상설계제도 등을 확대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처럼 공구를 잘게 쪼개 발주할 게 아니라 한 업체가 책임지고 시공하도록 하는 방식도 검토할 만하다.

황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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