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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직격 인터뷰

송호근 묻고 고은 답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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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문학청년이었던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왼쪽)와 고은 시인은 문학의 강물에 함께 빠진 듯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권커니 잡거니 시어를 나눴다. 시의 힘, 초월의 시심(詩心)을 우리 모두 누리자고 의기투합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송 : 작년 12월에 뵙고는 처음 만났네요. 벌써 11개월이 흘렀어요. 그동안 상을 한두 번 받으셨죠?

“마호메트와 예수도 설득보다 공감을 부른 시인이었다”

 고 : 네. 상은 본질적으로 벌과 내통하고 있어요. 어, 이거는 나에게 오는 기쁨인 것과 함께 나에게 오는 또 하나의 아픔이라고 여겨져요. 이 썩은 누런 이처럼 이거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느낌. 참 딱해요.

 송 : 세상사는 사람들의 기대나 어떤 벌, 뭐 이런 게 섞여 있나요?

 고 : 저는 그냥 타고난 사람들의 삶의 역동 속에서 살아나온 조그마한 가치들과 연결될 때 상이라는 개념이 생기지 않나 생각하고 싶어요. 그런 면에서 저는 근대 법학에 대해 의심이 많지요. 그러니까 언어가 법률에 적용됐을 때 불확실성, 불안정성이 생기잖아요. 자연스럽게 우리가 만들어가는 어떤 그 불문율, 이런 것이 참 좋은 가치가 아닌가 ….

 송 : 그게 한국 사회에 너무나 필요한 시의 세계이기도 하고요, 사회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사회, 원(原)사회의 정신이기도 하지요.

 고 : 시는 정말 필요합니다. 제가 시인이 된 이유는, 그전에는 몰랐어요, 이 세계의 공기에 대해 깨달았어요. 지금 11월, 이 가을은 깨달음의 시간입니다. 가을처럼 사람들에게 시적인 이유를 만들어주는 계절이 없지 않습니까. 여름에는 더워서 바쁘고, 봄은 꽃피는 것에 환장을 하고 그냥 미치고 그러다가 이것이 다 가면 자화상을 보여주는 게 가을인데 …. 예수, 소크라테스, 공자, 또 석가모니 이런 사람들이 제법 가을을 아는 존재들 같아. 낙엽. 나는 낙엽을 아주 숭배하지요. 나는 낙엽을 머리에 쓰고 왔습니다.

 송 : 예전에 ‘가을편지’ 그거 쓰셨죠.

 고 : 그거는요… 술 취해 옆에서 꾀어서 쓴 거예요. 참 내가 위선적인데 그거는 실수죠.

 송 : 최근에 마케도니아에서 상 받으셨을 때는 어떤 느낌이셨나요?

 고 : 마케도니아에서는 국가 사업으로 아주 오래된 시 축제가 있습니다. 지구상에 수만 명의 시인이 다녀간 나라는 마케도니아밖에 없어요. 시인의 수도지요. 거기에 천연 호수가 있는데요, 다리 하나가 시인의 다리예요. 그 물은 떠먹어도 되는 천연수예요. 호수의 저쪽에는 정말 산삼이 나오는 숲이고. 강이 쭉 아드리아해로 가는 거예요, 알바니아. 그런데 그 강에 시인의 다리가 있어. 시인의 다리. 이름이 그래요. 이쪽에 시인공원이 있는데 역대 수상자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이런 사람들이 나무를 심었어요. 한국의 태극기가 걸렸고 참 황홀하데요.

 송 : 황홀하셨겠네요. 그런데 그 나라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쟁에 휩싸였잖아요?

 고 : 우리 한반도보다 피, 아픔을 더 많이 갖고 있어요. 우리는 면목이 없을 정도의 아픔을 겪은 민족이에요. 그걸 시로 승화시키고 있습디다.

 고 : 나 같은 동아시아에서 온 보잘것없는 사람을 태양처럼, 달처럼 숭앙해 주는 게 황홀하더군요. 문화에 대한 신앙 같은 거, 예술인들을 신앙으로 믿는 경외를 느꼈습니다. 이슬람에는 ‘나의 성주는 대중이라’ 허, 이렇게 멋진 말을 한 시인이 있거든요. 마호메트는 칼잡이가 아니라 시인이에요. 그리스의 헤시오도스도 그렇죠. 그가 산꼭대기에서 목동 노릇을 할 때 저 산꼭대기에서 뮤즈들이 나타나 ‘너는 진실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라’ ‘너는 거짓을 거부하는 시인이다’ 그랬죠. 샤먼이죠. 신이 들린 거죠. 그 뒤로 이 무식한 놈이 백일장에 가서 1등을 한 거 아니에요. 국민 시인이 된 거죠. 그러니까 시는 참 영혼의 무식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웃음)

송 :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하죠 ?

 고 : 우리는 시베리아가 있죠. 가령 중국의 한자, 상형문자가 전부 주술입니다. 이성이 아닙니다. 길 도(道) 자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마을을 기습해서 적장이 숙직, 섹스하고 그럴 때, 취해 있을 때 그놈을 잡아가지고 목을 쳐서 딱 걸어 놓습니다. 그게 길 도 자의 상형문자입니다. 중국의 언어, 언술의 기초가 샤머니즘입니다. 공자가 무당의 아들입니다. 사생아, 그것도. 그러니까 그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고대의 이성을 강조한 일종의 이데올로기를 만든 거죠. 공자는 참 슬픈 남자예요.

 송 : 이성주의자는 돌아서면 슬프잖아요.

 고 : 나는 정말 시론이 싫습니다. 뉴욕대학에서 시를 강의할 때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내 기억에서 지웠다. 그리고 그 이후의 수많은 찬란한, 저 요망스러운 시학과 시론들을 오늘 내가 발로 짓밟는다. 시에 관한 한 나만 있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냥 자가자무(自歌自舞)다. 절로 노래하고, 절로 춤춘다. 어떤 지배 논리가 다 배제되어야 하겠죠.

 송 : 고구려 벽화를 보니까 그렇거든요. 그냥 춤추는 거죠. 곡식신도 있고, 뮤즈도 있고요. 그러면 선생님 시는 벽화입니까?

 고 : 나는 이 우랄알타이의 명예를 위해 마지막 등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인도는 본질적으로 유럽 쪽입니다. 히말라야 산맥이 인도, 중동과 우리를 분리시켰지요. 우린 농경사회를 만들었고, 우리의 언어를 만들었어요. 우랄알타이. 문자는 원래 배타적입니다. 기본적으로 경계를 만듭니다. 왜냐하면 자야 할 곳이 있고, 또 누군가가 오면 방어해야 되고, 이런 데서 자기 것이 생기고 하니까요. 바벨탑의 언어는 원래 분열적입니다.

 송 : 저 우랄알타이, 한반도의 언어는, 선생님이 시를 쓰실 때 부족하지 않으세요?

 고 : 나는 우리말에 갇혀 있는 사람이죠. 그럼에도 우리말을 떠나서 자유를 획득할 수가 없습니다. 갇혀 있습니다. 나는 종신수입니다, 모국어에 대해서.

 송 : 그러니까 저도 조금 놀라운데요. 사실 1950년대, 60년대에 쓰셨던 글은 관념어가 많았잖아요. 이 관념어 경계를 넓히려고 굉장히 노력을 하셨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대의 벽을 무너뜨리려 했다고 할까요.

 고 : 아니요. 나는 관념어에 대해 의심하죠. 내가 한 장점은, 이를테면, 칸트·헤겔·포이어바흐에 와서 망한 관념어, 관념, 이런 것들을 함부로 경외하지 말고, 정육점에서 동물의 머리를 사다 제사 지낼 때 입 벌려놓고 거기다가 돈 집어넣고 하듯이 그 관념을 딱 놓고 거기다가 샤머니즘으로 돈도 찔러놓고 그러고 싶죠. 일종의 모독행위가 필요하다는 거죠. 근대는 도저히 우리가 정면으로 이것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자기모멸이 필요하죠. 지구상에 근대만큼 무서운 병이 없죠.

송 : 선생님 시를 읽어보면 서양이 지긋지긋해 한반도로 오는 모습이 보이거든요.

 고 : 우리들의 이 체제, 교육, 의식구조, 모두 근대의 산물이죠. 이런 속에서 살면서 근대를 함부로 폄하하고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요. 이 지구라는 행성의 진화로 볼 때 이제까지 진화는 서구 중심이었죠. 나는 다른 진화를 꿈꾸고 싶은데. 그동안의 진화는 정지되어야 해요. 아까 왜 길 도 자 얘기를했습니다만, 이런 진화 말고 적의 뒷면을 돌아 쳐서, 달처럼, 달의 뒷면을 우리가 못 봤는데 그 달을 돌려서 뒷면을 보고 나와 친구를 만들고 적을 내 친구로 만들어 함께 살 수 있는 그런 새로운 또 하나의 시대가 그립죠.

 송 : 선생님께서 우랄알타이, 한반도를 포함한 거기에 마지막 등불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 마지막 등불이란 뜻은 새로운 근대를 보고 싶다는 소망 아닌가요?

 고 : 세계사고 동아시아고 뭐고 간에 좀 초월을 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니체의 초월 사상 같은 것, 위버멘쉬(bermensch), 인도의 20세기 철학자 중 아우로빈도 고시(Sri Aurobindo)가 있죠. 이번에 문학상 받으러 이탈리아에 갔는데, 그곳이 단눈치오의 고향이더군요. 이 사람도 초인 사상이 아주 치열하더군요. 아, 좀 이런 게 앞으로 우리 사회가 다른 얼굴로 있는 것, 이런 초월, 정말 아, ‘내 꿈은 초월이다’ 나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송 :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초월보다도 현실에 밀착해 있고, 현실 안에 들어가서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죠. 주제를 좀 바꿔, 세월호 사태를 겪으셨죠, 참 슬픈 얘기인데요….

 고 : 가을이 되면 아파야 되는데, 이미 아파버려서 가을에 아플 자격도 없어요. 그 배를 인양하지 못한 것처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을 다 건져서 제단에 올려두지 못한 것처럼 아직도 세월호 문제는 해결이 안 됐습니다. 아마 올해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이거는 우리의 본질적인 사회 구조와 맺어져서 앞으로 이 정권의 어떤 숙제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다음 정권도 이런 상처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실제적인 해결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우리의 어떤 문제라고 생각하죠. 전 정권은 토목 정권 아니었습니까. 우리 국토는 아직 그럴 수가 없는 국토인데, 하나의 귀납인지 연역인지 모르지만 세월호라는 사건으로 탁 터졌지 않습니까.

 송 : 그래서요, 예전엔 많은 사람이 모여 의례와 제례를 하잖아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슬픔의 가장 밑바닥에 내려가서 모든 사람이 의식을 치르는 게 우선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성의 문제를 넘어선 슬픔이란 게 있잖습니까.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전 국민이 일심동체가 돼 슬픔의 춤을 추는 거죠. 그러면 뭔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고 : 우리가 지금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데 이걸 총합해서 하나의 뭐를 만들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럴 때 우리는 토털, 그게 나는 초월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인류 사회의 이 정말 복잡다양한 해결 불능의 일을 그냥 거기다 놔두는 게 아니라 함께 축제로서의 초월을 만들어내자, 나는 이게 하나의 꿈이죠.

송 : 초월의식은 통일에도 필요합니다.

 고 : 우리 사회의 크나큰 강점이자 결점이 유토피아를 못 만드는 거다, 우리 사회가. 늘 현실에 안착해가지고 거기에 매어 있으니까요. 이 분단 구조가 이렇게 만들었는데요, 통일도 민족사적인 것을 넘어 인류사적 개념이에요. 통일이 왜 필요하냐면 자연으로 돌아가게 만들기 때문이죠. 나는 역사가 싫어요. 물론 내 친구 중에 역사학자도 있고, 나도 70년대에는 문학과 역사는 동의어다, 이렇게 말하고 그랬습니다만 나는 오늘날 역사는 자연이라고 외치고 싶어요.

 송 : 역사 이전의 야사(野史)로 돌아간다는 말씀이죠?

 고 : 선사(先史)로. 왜 가뭄이 들었을 때 둠벙에서 고기들이 막 서로 몰려 파닥거리잖아요. 그게 분단이거든요. 이 상태를 해결해야 우리가 제대로 숨을 쉬겠다는 거죠. 하나의 드라마와 같은 베를린 장벽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통일로 가고 싶어요.

 송 : 지난번 교황께서 언어, 경험, 풍습이 같아서 통일이 잘될 거라 말한 것도 거의 유사한 얘기 아닐까요?

 고 : 그건 그래요. 고대 이집트도 상이집트, 하이집트로 서로 적대했다가 나중에 람세스 시대에 통일이 됐고, 또 유대와 이스라엘도 남북이 얼마나 험했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이탈리아도 로마 이후에 분열됐다가 이제 겨우 통일됐는데 이것도 지금 남북이 끊어지려고 하지 않습니까. 프랑스도 독일도 그랬고요. 중국도 남북조가 있었지요. 남경은 우리 임시 수도 부산 같은 겁니다. 우리도 남북조 시대, 고대에 신라가 통일했다고 하지만 발해가 떡하니 있어서 그걸 역사학자들이 공식적으로 남북조라고 말하는, 오늘의 이 분단 아닙니까. 그래서 조선반도가 아니라 신통일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한반도 역사 몇 천 년의 새로운 통일을 한다, 이게 내 통일 지향이죠. 통일이 될 바에는 저질로 통일하지 말자. 남이냐 북이냐 하는 그 저질의 인품으로 하지 말고 우아한 초월적인 인품을 가지고 만나자, 그런 면에서 나는 통일이 쉽게 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나서 민족을 끝냅시다. 그다음에 나는 이민 가려고요. 그때 내가 혹시 살았다면, 태즈메이니아에 갈까, 저기 스페인에, 대서양에 어디 갈까, 혹은 북극에 가서 죽어버릴까 그래요.

 송 : 저도 우랄알타이 언어로 조금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체제가 달라도 초월적인 시심이 만나면 그로부터 정말 고상한 통일이 가능하다고 상상할 수 있겠죠.

 고 : 이북의 뛰어난 시인들을 만나보니까, 술 마시고 나중에 만나면 프리하게 심중을 터놓을 때가 많이 있어요.

 송 : 선생님께서 저 평양에 한 번 가셔서 한반도 전체에 우주의 언어를 쏟아내시면 어때요? 한반도 전체를 위해서.

 고 : 한 번 그런 심사로 간 적이 있었어요. 거기 초대소 방 한쪽에 홈바가 있는데 북한의 술 한 30여 가지가 있었어요. 구렁이술은 못 먹고 다른 술 마시고 취했어요. 하, 취향이 도도하니까 시가 나왔어요. 전화가 내 방에 왔어요. ‘역사적인 현장에 오니까 잠을 이루지 못했어, 아, 그래, 시 썼다’고 했죠. 그리고 대동강변에 나갔어요. 해가 막 돋아. 그 시를 읽어줬더니, ‘아, 좋구먼’ 뭐 어쩌고 그랬죠. 나중에 만찬장에서 읊었지. 다 환장했었죠.

 송 : 감동이네요. 그게 많은 사람이 선생님께 기대하는바, 초월의 시심 아닐까요.

 고 : 나는 태양의 아들이라고 생각해요. 옛날 고대 신화에 보면 전부 태양의 자손으로 천손이 이렇게 내려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놈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미생물이 전부 태양의 씨앗으로 온 거 아닙니까.

 송 : 아주 본원적인 데로 돌아가면, 이상적인 얘기기는 하지만, 통일을 고차원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 : 냉혹하게 휴전선이 있고, 저쪽에서는 포를 쏘고, 이런 게 현실 아닙니까. 사실은 정말 크게 보면 장난이에요. 역사의 크기를 보면. 레비스트로스의 장기지속 개념을 봐요. 산정할 수 없는 천 년 단위들, 역사를 천 년쯤의 단위로 봐. 독일은 뭔가를 기획할 때 300년, 정치 시간을 300년으로 보거든요. 동양도 옛날에는 그랬어요. 춘추라는 개념은 시간을 봄, 가을, 봄, 가을로 가르지 않습니까. 이게 항구성이죠. 그런데 우리 한반도 분단의 정치나 문화의 시간은 전부 당대입니다. 아까 얘기한 이명박, 토목 시간, 운하 찾아가는 시간, 또 이 정권은 앞으로 뭐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세월호 시간이랄까, 야, 이런 게, 참 우리가 사는 맛이 없어. 좀 거대한 시간 속에서 가설로 가다가 합의를 보는 거.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한 거죠.

 송 : 아까 유토피아를 말씀하셨지만 한국 사회는 특히 세월호 사건 이후에 지금까지 보면, 뭔가 기댈 수 있는 정신적인 자원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 : 미국에서 통계를 냈는데 베트남보다 우리가 못해요. 사는 맛이 못합디다. 나는 베트남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호찌민입니다, 모택동(마오쩌둥)보다도. 자기 민족에게 무아(無我)를 실현하는 사람, 자아가 아니라 무아.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할아버지, 아저씨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건 호찌민이 골초거든. 켄트(KENT)를 피워. 그게 또 예뻐. 얼마나 예뻐. 그러니까 고유성과 보편성 두 개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나는 호찌민의 시를 봤는데요, 시가 딱 두보 시 같아요. 담박하고 허영이 없어요. 나는 허영이 있잖아요.

 송 : 우리에게도 그런 사람이 더러 있겠지만 우리가 이룬 것에 비해서는 기댈 곳이 없지요. 시가 만들어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고 : 우리 민족뿐 아니라 이 지구상 전체에 시가 필요하다, 시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요. 함석헌 같은 사람은 시인이에요. 가령 조로아스터도, 마호메트도, 예수도 시인이에요. 소크라테스는 이론으로 설득을 했는데 예수는 느끼게 했어요. 시인이에요. 이런 시인이 앞으로는 세계 도처에 있어야 되겠다, 문학 장르로서의 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서 지금은 다 잊힌 시를 꺼내야 되겠다는 것이죠. 말씀처럼 시인이 필요합니다.

 송 :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건 한계가 있고, 진실을 붙잡고 가기에는 너무 허전하고, 한국 사회가 지금 그런 것 아닌가 싶은데요. 더 많은 시인과 소설가, 더 많은 예술가가 필요한데, 우리는 감성과 감정이 고갈되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선생님께 기대하고 사랑을 보내는 이유 아닐까요?

 고 : 사실은 감정이 말라 있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감정과 함께 태어나죠. 우리가 젖 먹고, 옹알이하고, 우는 거 이게 전부 감정의 행위 아닙니까. 감정은 영원합니다. 오히려 이성은 우리가 감정의 골짜기에서 이따금 찾아내는 보물 같은 것이죠. 그러니까 이성을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감정과 이성은 둘이 갈라져 있는 대립 개념이 아니라 같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죠. 브로멜리아라는 식물은 잎사귀가 파란데, 끝은 붉어서 꽃이야. 어, 잎의 그 파란 녹색의 최고의 형식이 빨간 꽃이더라고. 상사화, 진달래, 개나리는 꽃과 잎이 이별인데 브로멜리아는 꽃과 잎의 미분별, 이게 좋더라고. 이성과 감성을 우리가 근대적인 개념으로 분류시키기보다 동양에, 동아시아에 와서 불명료한 원형성, 여기에 와서 그냥 섞어서 놀다가 이름을 다 포기하라고 하고 싶어요. 그럼 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댈 곳이 생기지 않을까 해요.

 송 : 올해 동학 120주년입니다. 시인의 『만인보』는 상처 입은 사람들에 대한 위무일 수도 있고 초월의 시그널일 수도 있는데, 어떠세요? 동학 120주년에 감회는 없으세요?

 고 : 그것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동학의 숙제는 아직도 이게 미결이겠죠. 당시에는 농민이 실체였는데요, 지금은 시민이 실체가 되거든요. 시민 자체가 동학을 전혀 모르기에 자체적으로 동학적인 원소를 찾아내야 되지 않겠는가 여겨지네요. 그걸 기념하고, 그걸 잊히지 않게 하는 애도의 축제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산 자는 늘 죽은 자에 대해 강력한 중생의 의무가 있으니까요. 나 자신이 벌써 근대 문학의 먼저 간 선배들, 만해·김소월 또는 이육사, 나는 이육사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합니다만, 이런 사람들에 대해 늘 가슴에 담고 있습니다. 애도의 심정을 가지고 있죠. 이제 우리 시민 속에서 새로운 동학적인 어떤 역사 조건 이런 것을 찾아야 하지요.

 송 : 전적으로 동감하는데, 120주년이면 두 갑자를 지낸 것 아니겠어요. 환갑 두 번인데, 1960년대가 한 번이고, 지금쯤 변해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땐 농민이었지만 지금은 시민이다, 저는 그 말씀이 정말 귀중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세상에 대해 그게 정의가 됐건, 뭐가 됐건 목숨을 걸고 얘기를 한 거죠. 지금은 시민으로서 뭔가 말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게 계승하는 거 아닌가요?

 고 : 그런데요, 시민은 여러 가지 색깔을 갖고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여기 인터넷에서 떠드는 것 보면 여러 가지의 발언을 하지 않습니까. 참 놀라운데, 또 무서운 것은 그것에 반응하는 댓글입니다. 그게 정말 품질이 낮은 악질적인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것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주 깨끗하고 창조적인 언어들이, 정말 자발적이고 봉선화 같은 언어들이 이런 무서운, 음흉한, 정말 더러운, 추악한, 범죄적인 언어들을 스스로 정화시키는 사회 기반이 필요합니다. 시민의 힘, 역사 동력 이런 것, 새로운 동학의 시민화, 이런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참 좋은 지적입니다.

 송 : 네. 우리가 주목했던 거는 농민으로서 세상에 대해 어떤 대적 의식을 갖고 나타났는가, 어떻게 역사에 접속했는가 이 점 아니겠어요. 지금 시민들은 역사에 접속하고 있는가, 아니면 역사의 그 여러 가지 단점을 정말 예민하게 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될 것 같아요. 그거야말로 계승하는 거겠죠. 말씀하신 대로 시민 언어, 시민 의식을 우리가 깊이 새기고 있는가, 세월호 사태가 묻는 게 이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 : 사실 농민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농민에게는 논리가 없죠. 다만 자연이 있죠.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키워내고, 가을에 걷는 이런 천기의 자연환경 속에서 살았는데 그들이 그런 경험을 통해 얻은 정말 비논리적인 어떤 경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경륜이 하나의 종합을 이룰 때 하나의 정치 행위로서 동학 같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역사 행위보다 자연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시민은 자연 행위가 아닙니다. 시민은 근대라고 하는, 아파트라고 하는 기반에서 살고 있고, 또 거리와 광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전화를 하고 이런 시설이 있죠. 이런 데서 산 사람들이 그 자연의 햇빛이나 별빛이나 이런 것에서 얻는 강한 경륜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그 부르주아가 갖는 자기들 사유의 관성, 이 관성이 내가 볼 때는 매우 피지배적이죠. 그래서 여기에서 혁명은 쉽지 않습니다. 시민, 우리가, 이 지식인들이 말하는 이 부르주아나 시민들 속에서 뭔가 새로운 역사 동력이 나온다는 것, 이거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농민의 그 비논리적인 데서 비약할 때 나오는 것이지요. 무차별적으로 이기주의의 첨단을 가고 있는데 여기에서 역사라고 하는 공적인 임무, 쉽지 않죠. 그래서 시민사회가 오히려 농민보다 역사 행위는 더 쉽지 않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데, 다만 인터넷에서 서로 만납니다. 조우하지요. 하, 내 고백, 네 고백, 이것이 앞으로 정치 행위로 될 때는 정말 창조적인 폭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송 : 농민의 인식이란 생태적인 거죠. 시민 의식은 인위적이고 가공적인 거죠. 이 차이가 있겠네요. 이 차이에서 어떻게 역사와 선사와 접속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시로 풀어야 될 것 같은데요.

 고 : 역사라는 말을 정말 좋아했어요. 술 먹고 싶고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역사는 거대한 자연의 한 부분이라고 느껴요. 예전에는 감성의 근친상간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역사학자들 만나기가 싫어요. 만나봤자 자기의 둘레에, 고려사 후기, 전기, 조선 뭐 근대사, 이런 속에 갇혀가지고 뭐라고 뭐라고 하는 걸 보면 참 불쌍한 중생 같고 그래요. 역사는 좀 큰, 이렇게 좀….

 송 : 그렇죠. 그 종합은 대시인이신 선생님께서 하셔야 될 건데….

 고 : 아니, 대시인이 아닌 고루한 시인이죠.

 송 : 선사로 가기 위한 초월, 이것이군요.

 고 : 잃어버릴 거 잃어버리고, 정말 이 내 가슴의 심장도 잃어버리고, 췌장도 잃어버리고, 그냥 무슨 해골처럼 이렇게 형해화돼 있다가 정말 여기에 필요하면 태양이나 달이, 별이 나에게 꿈도 주고, 나에게 어떤 이데아도 주고, 그거예요. 나는 그렇게 상실의 시대를 한 번 살고 싶어요. 뭘 가둡니까. 역사 속에 무슨 가치를.

 송 : 그게 그 기쁨에 사는 건지요?

 고 : 슬픔이라는 것은 항시 기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 언어를 만든 게요, 슬픔기쁨, 또 기쁨과 슬픔 그래서 깁슬픔, 그렇게 언어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두 개는 하나예요. 정말 황홀한 경치가 앞에 있을 때는 슬프거든요. 내가 옛날에 ‘아름다움은 슬픔이다’ 그런 말을 했는데,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설교하고 미사하실 때 인용하고 그랬었죠.

 송 : 지금 한국 사회의 그 결핍증을 깁슬픔 속에서 승화해낼 수 있다 이건가요?

 고 : 조지훈 선생이 왜 우리 문화사를 정리할 때 최초는 힘의 예술, 나중에는 슬픔의 예술이라 했는데, 이게 근대까지 온 것이죠. 우리가 한(恨)이 많지요. 이후 우리 한국은 이 한을 넘어서 흥(興), 흥(興), 신명이 나가지고 했는데 그런 것이 경제적으로는 현대, 삼성으로 나타나고, 또 저기 울산에선 큰 배 만들고 그랬다가 이제 조금 꺾여가지 않습니까, 중국에 의해서. 이럴 때 우리가 흥을, 지났던 흥을 어떻게 다시 붙잡아서 이 한 번으로 끝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이게 아마 역사 행위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송 : 아, 그거야말로 현재의 위기감과 안절부절 상태에 빠져 있는 한국인들에게 줘야 될 시인의 말씀 같아요.

 고 : 주어진 조건은 우리가 다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조선 후기에 타자와 자기, 이 두 원인에 의해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왜놈의 위협이 절대 조건으로만 된 게 아닙니다. 내외 조건이 하나의 조건을 완성하는 것인데, 우리가 앞으로 이런 조건을 생각할 때, 아, 정말 우리는 신나게 나갔는데, 달리기할 때는 지치지 않습니까. 쉴 때 와서 감기 들지 않습니까. 그때는 병을 앓아야죠. 다른 약을 해가지고 병을 무시하면 안 되지요. 그러니까 병을 앓고 다시 또 달려야죠. 우리 시대로써 우리 삶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지 않고, 그냥 우리는 도상에 있는 과객, 이백의 말대로 과객입니다. 그전에는 한(恨), 지금은 흥(興)이었는데, 이 위기의 시대에 한과 흥을 종합해가지고 한 번 나가보자는 거죠.

 송 : 한 달 남은 2014년도를 마감하는 대시인이 우리에게 주는 언어군요. 한과 흥의 결합, 그렇죠? 고맙습니다.

 고 : 아이고, 헛소리했습니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고은은 …

1933년생. 58년 처녀시 ‘폐결핵’을 발표하고 ‘현대문학’에 ‘봄밤의 말씀’ ‘눈길’ 등을 추천받아 등단했다. 60년 첫 시집 『피안감성』을 선보인 이래 시·소설·평론·에세이 등에 걸쳐 15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서사시 『백두산』 7권, 전작시 『만인보』 30권 등 한국사와 민중을 꿰뚫는 대하 연작시로 한국 시단을 두텁게 했다. 그의 시집과 시선집이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 세계 25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등단 55년을 지나는 동안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한국민예총 초대 회장 등을 지냈다. 한국 문학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떠올라 미국 하버드대 예칭연구소 초빙교수, 버클리대 동양학부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노벨 문학상의 계절이면 단골 후보로 손꼽힌다. 현재 한겨레사전 남북한 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며 국내외 시단에서 창작활동 중이다.

[인터뷰 후기] 팔순에도 빛나는 눈빛

작년 세모에 노시인과 헤어졌던 그 시간 흩날리던 눈발을 기억했다. 다시 돌아온 늦가을, 눈발이 날리기 전 나는 편지를 썼다. 세월호에 지친 시민들의 가슴을 적셔줄 시어(詩語)가 필요했다. 그가 교신한 우주의 사투리라면 한국인의 심사를 괴롭힌 세월호 사태를 선사(先史)의 감성으로 발효시킬 거라고 생각했다. 봄, 여름까지 너무 아파했기에 이제 아플 자격이 없다고 투덜대며 그가 나타났다. 뒤품에 술병을 하나 감춘 채로 말이다. 그에게선 늘 술 향기가 난다. 아니 그가 분출하는 시흥(詩興)이 세상의 모든 냉혹한 현실을 취하게 만든다.

 그동안 노시인은 시인의 수도 마케도니아를 다녀왔고,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역사는 천 년을 단위로 봐야 자연과 교접한다고 그는 말했다. 도저히 팔순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그의 눈빛은 혜성에 달라붙은 탐사로봇 파일리(Philae)처럼 황홀한 초월을 채굴하고 있다. 그를 현실로 끌어당기는 사회학자의 견인은 비 오는 암반에 발을 대듯 자꾸 미끄러졌다. 그래도 농민에서 시민으로 진화한 지난 120년의 역사 앞에서는 잠시 현실주의자로 내려왔다. 그도 잠시, 한(恨)의 정서가 다시 엄습하는 이즈음의 위기를 흥(興)으로 끌어안자고 말하곤 다시 시인으로 돌아갔다. 선사(先史)로 탈주하는 노시인에게 보낸 가을편지는 우랄알타이의 언어로 쓰인 것이지만 답장은 인류 보편적 문자였다. 어쨌든 내년에도 보낼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