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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시즘의 화신? ‘어우동’을 위한 변명(辯明)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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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제적’ 여성 중 한 명인 어우동은 특별한 패션으로 일반인들에게 익숙하다. 1985년 영화 <어우동>에서 어우동을 연기한 배우 이보희(가운데).

어우동이 9월과 10월, 잇따라 소설(<어우동, 사랑으로 죽다>)과 영화(<주인 없는 꽃: 어우동>) 주인공으로 우리 곁으로 왔다. 소설에서는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는 로맨틱한 인물로, 영화에선 조선시대 자유분방했던 에로티시즘의 대상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시각은 그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요부로 알려진 어우동은 실제 역사 속에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조선의 역사에 등장하는 ‘문제적’ 여성을 꼽으라면 어우동을 빼놓을 수는 없다.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유교적 관념에 비춰볼 때 그녀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세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오늘날까지도 영화와 소설의 단골 소재로 그려지고 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어우동을 표현하라고 하면 ‘자유부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우리 사회에서 어우동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다. 요부이거나, 여성에게 조선 사회에서 금기시된 성적 자유를 추구한 주체적인 여성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후자의 시선으로 어우동을 평가 한다고 해도 그녀의 행동은 여전히 여성으로서 위태로운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의구심은 막연한 불안이 아니다. 본인 행실이 문제시돼 사형에 처해진 어우동의 삶이 이를 방증한다. 여성이 욕망을 좇다가 파국으로 치달은 사례를 역사가 입증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어우동이 사형당하는 결말을 좇아가다 보면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 욕망을 품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사회에서 어떤 성적행위를 음란하고 위험하다고 평가한다면 그 기준은 어떻게 마련한 것일까? 어느 연구에 따르면, 성(性) 의식이나 성행위의 양식은 절대 가치가 있다기보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문화 현상으로 본다. 곧 어떤 성적행위가 괜찮은지 아니면 그릇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회의 지향점이나 가치관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우동이 요부인지 시대의 희생양인지를 따져보는 일은 어우동이 살다 간 15세기 중반의 조선 사회를 평가해보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우동(於宇同 또는 於乙宇同, ?~1480)을 우리말로 옮기면 ‘얼동’ 또는 ‘늘동’이라 한다. 어우동은 15세기 중반 무렵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윤창(朴允昌)이며 어머니는 정씨(鄭氏)로, 꽤 재력 있는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어우동의 남편은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이었다. 다시 말해 어우동은 왕실 일가인 종친(宗親)을 남편으로 둔 지체 높은 여성이었던 것이다. 어우동은 남편 태강수의 사이에서 번좌(番佐)라는 딸을 두었다.

조선사회 위협하는 ‘공공의 적’

어우동 이야기가 기록돼 있는 <성종실록>.

어우동에 대한 기록은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자세히 나와 있다. 또한, 어우동과 동시대를 산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齋叢話)>에도 소개돼 있다.

이들 기록을 토대로 당시의 어우동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남편 태강수는 젊은 은장이를 불러 은그릇을 만들었다. 그런데 어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해 여 종처럼 꾸미고 나가 그의 옆에 앉아 이야기하며 가까이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어우동을 친정으로 쫓아버렸다.

집에서 쫓겨난 어우동은 이때부터 몸종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남성과 간통했다. 이름도 ‘현비(玄非)’로 고쳤다. 어우동은 때론 신분을 숨긴 채 첩이나 기생, 여종 등으로 행세하면서 남성들을 만났다. 종친에서부터 관료, 생원, 서리, 사내종에 이르기까지 신분이나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성종실록>에 실려 있는 어우동 사건의 전말이다.

하지만 어우동이 남편에게 버림받은 속내를 들춰 보면 원인은 다른데 있었다. 어우동 사건이 발생하기 4년 전에 남편 태강수가 기생 연경비(燕輕飛)를 사랑한 나머지 어우동을 제멋대로 내쳐버린 것이다. 이에 종친 사무를 관장하는 종부시에서는 “종친으로서 첩을 사랑하다가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버렸다”며 태강수를 고발했다.

태강수는 이 일로 본인 직위를 입증하는 직첩[告身]을 빼앗기고 어우동과 재결합하라는 왕명을 받았다. 이후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태강수는 직첩을 돌려받았고, 4년 뒤 어우동은 죄인이 되어 있었다.

어우동은 본인의 스캔들이 임금에게 알려지면서 음란한 여성으로 낙인 찍혔다. 한마디로 15세기 조선 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공공의 적’이 돼버린 것이다. 어우동이 처음 남편에게 내쫓긴 배경에는 남편과 기생 연경비의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어우동 사건이 불거지면서 남편이 무리하게 혼인 관계를 파기한 사실은 파묻혀버리고 어우동의 행실만 시비의 대상이 된 것이다.

왜 어우동만 사형에 처해졌을까

수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어우동은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보기 드문 에로티시즘의 상징으로 그려졌다. 영화 <어우동>의 포스터.

어우동 사건이 터지자 의금부는 발 빠르게 성종에게 처벌 수위를 보고했다. 의금부는 어우동의 죄를 간통죄로 간주, 장(杖) 1백 대에 유(流) 2천 리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종친의 처이자 양반가의 딸로서 천한 기생과 같은 행위를 한 게 크나큰 논란거리였다. 거기에다 양반 관료들은 지체 높은 부인이 ‘종놈’과 간통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어우동의 처벌을 둘러싸고 논의가 그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비록 죄가 무거우나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죄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관계되니 뒷사람의 본보기가 될 수 있게 최고 형률을 적용해 사형에 처하자는 주장이 대세를 이뤘다.

그리하여 성종은 “지금 풍속이 아름답지 못해 여자들이 음란한 행동을 많이 자행하고 있다. 어우동이 음탕하고 방종하기 이를데 없는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을 어떻게 징계하겠느냐?”고 하며 사형을 명했다. 마침내 1480년(성종 11) 10월, 어우동은 수많은 논의 끝에 목매달아 죽이는 형벌인 교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에서도 이름이 지워졌다.

종종 사소한 문제를 놓고도 심각한 차이를 드러내던 국왕과 관료들은 여성의 규범 문제에서는 동조자가 됐다.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 특권이 이러한 통치 방식을 유지할 때에 더 공고화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어우동과 비슷한 사건으로 세종 대에 판관 최중기(崔仲基)의 부인 유감동(兪甘同) 사건이 있다. 양반 여성 유감동은 남편이 있는 상태에서 수십 명의 남성과 간통했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 장을 맞고 변방 관아의 여종으로 강등됐다. 그러나 유감동은 어우동처럼 죽음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우동이 유형으로 처리되지 않고 더 큰 중벌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은 개국 후부터 고려 사회의 몰락을 교훈으로 삼으면서 국가의 긴급한 사명은 인간의 본성을 순화 하고 풍속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여겼다. 조선의 개혁가들은 고려와 다른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규범도 강화했다. 그리하여 우주론적으로 하늘에 해당하는 남자가 땅이라 할 수 있는 여자에게 군림하며, 이 보편성을 인간 사회에 잘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낮은 존재인 여성의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어우동이 살던 시기는 성종 대였다. 성종은 양반 여성의 개가(改嫁)를 막기 위해 재가한 여성의 아들 및 손자는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든 왕이다. 근대 국학자 이능화(李能和, 1868~1945)는 기생의 역사를 다룬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조선에서는 성종대왕과 연산군이 가장 기생을 좋아했다”고 적고 있다.

이능화가 어떤 근거로 성종에 대해 기생을 좋아한 국왕으로 평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성종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 역시 여성 문제에서 자유로운 국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종은 사회 정책으로 바른 성윤리를 추구했고, 아름다운 풍속이 사회의 버팀목이 된다고 확신했다.

요컨대, 여성의 정절이 굶어 죽는 것보다 더 중하다고 여기는 분위기에서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어우동은 윤리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걸림돌이 되는 사회악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어우동에 대한 판결에는 15세기에 여성에 대한 다양한 통제를 매개로 하여 조선 사회로 이끌고자 한 사람들의 야망이 숨어 있던 것이다.

어우동이 교형을 받은 뒤 어우동과 관련된 남성들은 한바탕 큰 소동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풀려났다. 또한, 출세하는 데도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다. 천한 기생과 같은 행동을 한 어우동 때문에 ‘뜻있는 선비들’이 괜한 피해만 입었다는 식으로 의견이 모아지면서 대부분 풀려났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우동이 중죄를 면하고자 고의로 죄 없는 많은 남성을 끌어 들였다는 기록까지 등장했다.

함께 연루된 남성들은 사회로 복귀

어우동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에도 그녀와 어울렸던 남성들은 대부분 생업에 복귀했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 교형을 받는 어우동.

어우동 사건이 일어났을 때 연루된 남성만 해도 수 십 명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중 종친 이기(李驥)는 어우동과 간통한 죗값으로 속전(贖錢)을 바쳐 장을 면한 후에 멀리 유배됐다. 그러나 어우동이 죽은 후 이기는 그녀를 잘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다시 풀려났다.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한 이승언(李承彦) 역시 등용할 만한 인재라 하여 문과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얻었다. 공신 출신으로 이조 판서를 지낸 어유소(魚有沼)도 이 일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으나, 모함을 받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홍찬(洪燦)은 문과에 합격한 출중한 인재였다. 홍찬이 어우동과 어울린 사실은 꽤 유명했는지 <국조 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도 “어우동과 간음했다가 유배당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 그가 어우동 사건이 종결된 후 3년 만에 감찰이 됐다가 물의를 빚었다. 성종은 “어우동 행실이 창기와 같았는데 홍찬이 여기에 연관돼 흠이 되었으니 참으로 불쌍하다”고 하며 안타까워했다. 결국 논란 끝에 홍찬은 감찰에서 물러났으나 성종은 선전관에 자리가 생기면 임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성종 및 위정자들은 어우동에겐 서릿발 같은 냉혹한 법의 잣대를 적용했다. 하지만 어우동과 어울린 남성들에게는 죄가 애매하다거나, 간통이라는 오점 하나 때문에 출사를 가로막는 것은 가혹하다는 이유로 사회로 귀환시켰다.

어우동 사건은 그녀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모두 어우동을 비난할 때 어우동을 끝까지 감싸준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어우동의 어머니는 사람들이 딸을 비난하자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너무 심하게 현혹된 것뿐이다”고 주장했다. 결국 어우동의 어머니도 어우동의 행실을 빌미로 평소 행실이 나쁘다는 소문이 돌았다. 심지어 어우동의 아버지는 그녀가 자신의 친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하여 어우동의 나쁜 행실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한동안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어우동은 교형을 받으면서 사라졌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교형 이후에도 어우동이라는 이름은 살아 있을 때 못지않게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그리고 어우동을 죽음으로 내몰던 사람들의 의도와 달리 이야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끝나지 않은 어우동 이야기

어우동 사건을 생생하게 담아낸 <용재총화>의 저자 성현은 “모두 말하기를 ‘법으로 죽일 수는 없고 먼곳으로 귀양 보내는게 합당하다’고 했다. 그러나 임금이 풍속을 바로잡고자 하여 형에 처하게 했다”고 적었다. 한마디로 지나친 처벌이라는 지적이다.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어떤 사신(史臣)도 “김계창이… 엄한 법을 쓰도록 권했으니 이때 여러 논자가 잘못되었다고 여겼다”고 논평했다. 당대에 말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사형을 둘러싼 논란의 불씨가 성종 시대가 끝난 뒤 되살아난 것이다. 심지어 어우동이 죽은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성종 대에 어우동을 사형시킨 것은 역시 합당하지 않았습니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우동의 사형은 여성들이 국가나 사회가 요구하 는 길에서 벗어날 때 어떤 처벌을 받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였다. 그래서 유사한 행동을 한 양반가의 여성들을 처벌할 때 잣대로 활용했고 그녀는 오랫동안 음녀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도한 법집행을 경계하는 중요한 사례로 남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6세기에 활동한 학자이자 문인 권응인(權應仁)이 엮은 <송계만록(松溪漫錄)>에는 지은이 미상의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시가 실려 있다. 당시 이 시는 어우동의 시로 알려졌다.

백마대 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낙화암 서서 많은 세월 지났네./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았다면/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리.

여기서 이 유장한 시가 어우동의 시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왜 사람들이 이 시를 어우동의 시로 여겼느냐가 더 중요하다. 20세기 초에 간행된 <대동시선(大東詩選)>에서도 이 시의 작자를 어우동으로 소개하면서 “그 시가 뛰어나나 (행실이) 아름답지 못해 기록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적어도 이 시가 오랫동안 어우동의 시로 회자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용재총화>에 따르면 어우동이 형장으로 끌려갈 당시의 상황에 대해 “여자가 행실이 더러워 풍속을 더럽혔으나 양갓집 딸로서 극형을 받게 되니 길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적고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어우동을 음탕한 여자가 아니라 재주 많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한 인물의 삶이란 그 사회를 읽어내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어우동의 사형은 한 개인의 비도덕성보다는 당대 사회의 사회적 진로와 지향점 속에서 결정됐다. 어우동은 한 시대가 추구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 유배형으로 끝날 수도 있었는데 죽음까지 이른 데에는 이런 이유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어우동을 다시 불러내는 작업은 15세기 조선 사회를 올바로 바라보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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