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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깊이읽기] "6월항쟁 유혈진압, 미국이 막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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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아시아 비망록
제임스 릴리 지음, 김준길 옮김
월간조선사, 2만7000원

한반도가 군사독재 아래에 있던 시절 주한 미국대사는 이 땅의 총독이나 다름 없었다. 민초들이 군부독재의 전횡에 시달리며 스스로의 운명을 모르고 살아가는 동안 미국대사는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곤 했다.

'아시아 비망록'에 따르면 현대사의 한 분수령을 이루는 6.29 선언을 만들어낸 배경에는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 못지 않게 제임스 릴리(사진) 전 주한 미국대사의 역할도 컸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6.29를 자신의 고뇌에 찬 선언인 양 발표함으로써 그해 말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이후 전두환 전대통령 측근들은 "사실 6.29는 전 대통령의 결단"이라며 자신들에게로 공을 돌렸다.

릴리 대사가 털어놓은 진상은 이렇다. 1987년 6.10 민주화운동 당시 서울역 광장에 모였던 수십만명의 시위대가 명동 성당에 몰려 철야농성에 들어가자 전두환 군부정권은 유혈진압을 계획했다. 제2의 광주 참상을 자행하겠다는 결심이었다. 릴리 대사가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면담을 요청했지만 계엄령을 지시한 전 대통령은 대사를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 미국 대사관 정무담당 직원이 외교부 관계자들에게 "누가 면담을 가로막는가. 이름을 말해달라"며 책임을 따지고 들어 겨우 면담이 성공했다. 전 대통령이 이미 군출동을 지시한 6월 19일 오후였다. 릴리 대사는 계엄령 반대 뜻을 완곡하게 밝힌 레이건의 친서를 건네주면서 분명하게 계엄 반대 의사를 밝혔다. 면담 직후 전 대통령은 계엄령을 철회했다. 곧바로 민주화 선언 준비를 지시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계엄령 반대를 주장한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회고록에 따르면 전 대통령이 이미 군동원령을 내린 상황에서 결심을 바꾼 것은 릴리 대사의 공이다.

릴리 대사는 결코 민주화 운동가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미국 정보부(CIA)에서 잔뼈가 굵은 보수 외교관이다. 그런 사람이 한반도의 민주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철저한 외교관,즉 자국의 이익을 냉정하게 챙기는 능력 있는 외교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미국의 이익은 인류 보편적 가치이기도 하다. 냉전 시절 민주화를 통해 공산세력의 확산을 막아낸다는 전략이다.

릴리의 관점만 아니라 글쓰기도 외교문서처럼 다소 딱딱하다. 그러나 릴리 자신의 말처럼 '진실은 그 자체로 호소력이 있다'. 굳이 상상력을 보태거나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지만 동아시아(중국.한국.대만)의 격동기(1950년대부터 90년대초까지)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특히 중국 천안문 사태를 현장에서 생중계한 미국 대사관 직원 얘기는 잔혹한 중국 현대사를 생생히 느끼게 한다. '아시아를 사랑하기보다 이해하려 노력했다'는 릴리의 성격과 경력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담백한 기록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아시아에서 활동한 저자이지만 어디까지나 철저한 미국식 합리주의자임을 감안해 읽어야 한다. 제국주의적 논리로 해석되는 대목이 적지않다. 무엇보다 양심적인 기록 한 줄 남기지 않는 이 땅의 권력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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