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삶과 추억]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 … 한국 섬유계 큰 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00호 12면

중앙포토

이동찬(사진)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8일 별세했다. 92세. 코오롱그룹은 이날 “이 명예회장이 노환으로 별세했으며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빈소가 마련돼 9일부터 조문을 받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경북 영일 출신인 이 명예회장은 오사카 흥국상고와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뒤 부친인 이원만 선대회장과 함께 국내 섬유종가로 불리는 코오롱그룹을 세운 주역이다. 이 명예회장과 섬유의 인연은 깊다. 이 선대회장이 1937년 일본 오사카에서 아사히피복회사를 설립해 모자사업을 시작할 당시 15세였던 이 명예회장은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면서 사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45년 해방 뒤 이 선대회장은 일본에서의 사업을 정리한 뒤 귀국해 대구에서 경북기업주식회사를 세웠다. 해방 후 이 명예회장은 경찰이 돼 잠시 공무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경찰을 그만둔 고인은 선대회장이 51년 일본에 세운 삼경물산이란 무역회사의 서울사무소를 맡아 운영하면서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한국전쟁은 그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한국전쟁 이후 나일론 수요가 급증하자 선대회장과 이 명예회장은 57년 대구에 코오롱그룹의 모태가 된 한국나일론을 설립해 국내 첫 나일론 공장을 건설했다. 그를 국내 화학섬유시대의 선구자로 꼽는 이유다. 기초 생활소재인 나일론의 국내 첫 양산은 한국 의류혁명의 밑거름이 됐다.

이 명예회장이 코오롱그룹 사업 전면에 나선 것은 77년 삼촌이던 고 이원천 코오롱TNS 전 회장에 이어 코오롱그룹 대표에 취임하면서다. 이때 한국나일론을 한국포리에스텔과 합병하면서 상호를 ‘코오롱(KOLON)’으로 바꾸고 새롭게 출발했다. 코오롱이라는 사명은 코리아 나일론(KOREA NYLON)에서 나왔다. 이 명예회장은 2세대 경영자지만 창업주인 부친을 도와 창업 초기부터 회사의 기틀을 다져 재계에서는 창업 1.5세대로 불린다.

고인은 대표 취임 후부터 적극적인 연구개발(R&D) 투자로 기술 혁신에 속도를 냈다. 코오롱은 80년대 필름·산업자재로 사업영역을 넓혔으며, 90년대에는 초극세사를 이용한 고부가가치의 첨단 섬유제품을 개발했다. 90년대 초반에는 제2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하기도 했다.

2007년 4월 코오롱 경북 구미공장에서 열린 창립 50주년 행사 때 이동찬 명예회장(오른쪽)과 이웅열 회장이 함께 입장하고 있다. [중앙포토]

고인은 재계의 웃어른 역할도 했다. 82년부터 97년까지 15년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경제단체를 이끌었다. 스포츠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70년 여자실업농구연맹 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대한농구협회장·대한골프협회장 등을 잇따라 지내며 한국 체육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 명예회장은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라는 철학으로 마라톤 발전을 이끌었다. 그는 “승리를 위해 일정한 페이스로 힘차게 달려가는 마라톤은 ‘단숨에 빨리’가 아니라 ‘정도로 쉼 없이’ 멀리 달려야 한다는 내 철학과 잘 맞는다”고 말하곤 했다. 코오롱 마라톤팀을 운영하면서 많은 스타 선수를 배출했는데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황영조 등이 코오롱팀을 거쳤다.

고인은 95년 12월 경영 일선에서 은퇴하고 경영대권을 외아들인 이웅열 회장에게 물려줬다. 당시 은퇴 기자회견에서 이 명예회장은 “아들이기 이전에 (이 회장이) 그룹에서 가장 열심히 미래를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일하기 때문에 그룹 총수의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고인은 은퇴 이후 취미인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고인은 한 경영 월간지 2008년 9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60이 넘어 미술 선생을 초빙해 그림을 그린 지 25년이 지났지만 그림 선생은 내 그림을 ‘사실적이고 섬세하다’고 지적한다. 과감한 생략이나 추상적 표현을 통해 예술성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고인은 “일이나 사업을 할 때는 승부사적 기질이 필요하지만 취미생활을 할 때는 깊이 빠지지 않고 적당히 즐기는 것에 참맛이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고인은 골프에 관해서는 다른 병폐가 있다고 고백했다. “골프 친구와 겨루는 자리에서 지기 싫어 무리수를 두었고, 결국 ‘신경 과민성 근육 경직’이라는 병이 찾아왔다. 절대로 남에게 지기 싫어했다가 그런 증세가 찾아온 것 같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63년 골프를 시작했을 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레슨을 받았고, 첫 라운드에서 100타를 깨 주위를 놀라게 했다. 1년 만에 싱글이 됐고 아마추어 대회에 나가 상도 여러 번 탔다.

평소 “바른 마음가짐이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강조했던 고인은 2001년 자신의 호인 ‘우정(牛汀)’을 따 우정선행상을 만들기도 했다. 지난 4월 제14회 우정선행상 시상식에 참석한 고인은 “더 많은 사람이 선행에 감명받고 함께 참여하면서 더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 갔으면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 명예회장은 금탑산업훈장(82년, 2004년), 체육훈장 백마장(8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92년, 2004년), 체육훈장 청룡장(92년, 2004년)을 받았다. 유족은 이웅열 코오롱 회장 등 1남5녀.

이수기 기자 retalia@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