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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경제사] 비잔틴 천년제국의 최후 전투, 세계 경제를 뒤흔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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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호 20면

그림 1 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 ‘해외여행’, 1455년. 콘스탄틴노플이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이슬람군대에 포위된 모습.

메흐메트 2세는 ‘정복자(Fatih)’라고도 불린다. 그는 스스로를 시저나 알렉산더를 뛰어넘는 인물이라고 여겼다. 이런 자부심은 그가 이룬 세계사적 업적에 기초한다. 메흐메트 2세가 21세의 젊은 나이에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역사의 새 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비잔틴제국의 수도이자 기독교 세계의 중심 축이자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경제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이 그의 손에 의해 이슬람 세계의 일부가 됐던 것이다.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16>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프랑스 부르고뉴 출신의 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Bertrandon de la Broquière)라는 인물이고, 제작연도는 역사적 전투가 끝난 지 불과 2년 뒤인 1455년이다. 화가는 부르고뉴 공작인 필리프 선량공(Phillippe le Bon)으로부터 총애를 받던 향사(하급 귀족)였다. 필리프는 백년전쟁에서 영국군과 동맹을 맺고 잔 다르크를 사로잡아 영국군에 넘겼던 인물이다. 베르트랑동은 1432~1433년 중동으로 성지 순례를 나서 기독교 및 이슬람 도시들을 방문하고 술탄에서 상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돌아왔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제국의 손에 넘어간 직후 필리프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경험을 『해외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저술의 목적은 무슬림 손에 넘어간 콘스탄티노플을 되찾기 위한 새 십자군운동을 기획하는 데 있었다. 이런 까닭에 베르트랑동은 역사책에서 스파이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특성을 반영해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오스만제국의 군사전략이 공들여 묘사돼 있다.

콘스탄티노플이 외부에서 군사적으로 공략하기 힘들었던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곽이었다. 4세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건설한 이 성곽은 1024년 십자군에 의해 한 차례 함락됐을 뿐 10여 차례의 공성전을 막아 천년제국을 지켜낸 막강한 방어막이었다. 비잔틴군은 이 성벽을 더욱 보강해 놓고 이슬람군대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철통방어의 둘째 요인은 위쪽 보스포루스해협에서 아래쪽으로 뻗은 긴 물길, 그림에서 왼편 성곽을 따라 내려오는 ‘골든 혼(Golden Horn)’이라 불리는 수로였다. 이 물길의 양 끝을 육중한 나무 구조물과 쇠사슬을 이용하여 봉쇄해 놓으면 침략군은 이 도시를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방어체계를 메흐메트 2세의 군대는 어떻게 뚫을 수 있었을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오스만군대의 사령부가 위치한 아래쪽 금빛 막사 뒤로 포병들이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 오른편으로 오스만군대가 자랑하는 초대형 대포가 시선을 끈다. 성곽의 파괴는 이 대포가 맡았다. 메흐메트 2세는 헝가리 출신의 대포 기술자 우르바노스를 영입해 포신이 8m를 넘고 450㎏짜리 돌덩이를 1.5㎞ 이상 날릴 수 있는 지상 최대의 대포를 제작했다. 이 포는 사용 중 파열되고 말았지만 오스만군의 최신 대포들은 방어벽을 타격하기에 충분했다.

골든 혼의 방어막을 극복하기 위해 메흐메트 2세는 더욱 획기적인 작전을 고안했다. 보스포루스해협의 전함을 육지를 통해 골든 혼으로 끌어오는 방안이었다. 땅 위로 2㎞에 가까운 목재 레일을 깔고, 그 위로 60~80척의 전함을 운반해 골든 혼으로 들여놓은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왼편으로 육지에서 선박을 이동시키고 있는 병사들이 보인다. 베르트랑동이 군사전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이 그림이 역사가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인식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도 약점은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건축물들이 모두 서유럽에 많았던 고딕양식으로 표현돼 있다는 것이다. 건축양식은 스파이 화가의 관심이 아니었나 보다.

그림 2 파우스토 조나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있는 메흐메트 2세’, 1908년.

오스만군의 골든 혼 공략 전술은 20세기 초에 제작된 다른 작품에 묘사돼 있다. 그림2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오스만제국의 궁정화가로 활약했던 파우스토 조나로(Fausto Zonaro)가 그린 작품이다. 술탄의 요청으로 제작한 이 그림에서 메흐메트 2세가 선박 이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총 57일에 걸친 공성전 끝에 메흐메트 2세의 군대는 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의 군대는 오스만제국의 전통에 따라 3일간에 걸쳐 도시 전역에서 약탈을 벌였다. 술탄은 3일째 되는 날 약탈 종료를 선언했고, 곧바로 도시를 재건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이 역사적 도시를 파괴하지 않고 오스만제국의 새 수도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특히 유럽의 무역을 주도해 번영을 구가해 왔던 베네치아 사람들은 위기감에 휩싸였다. 경제적 번영의 근간인 동방무역, 즉 아시아에서 들어오는 향신료·직물·도자기 등을 유럽 전역에 판매해 이익을 얻는 무역활동이 전면적으로 중단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인들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동방과의 교역을 재건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한데, 이교도와의 접촉을 못마땅해하는 교황청의 매서운 눈길도 부담스러웠다. 결국 베네치아는 무역강국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오스만제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그 방법은 가급적 교황청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고심 끝에 짜낸 아이디어가 바로 저명한 화가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를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해 술탄의 환심을 사게 하는 것이었다.

그림 3 메흐메트 2세의 두 초상화. 1480년께.

그림3은 1480년께 그려진 메흐메트 2세의 두 초상화를 대비시켜 보여 준다. 첫째 그림은 터키풍으로 그린 초상화로, 장미꽃을 들고 향기를 맡는 전통적 포즈로 묘사돼 있다. 둘째 그림이 벨리니의 작품으로, 깊은 사색에 잠긴 듯한 술탄의 모습을 화려하고 중후한 장식 안에 배치시켰다. 현대 외교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화외교의 중요한 선례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전략을 통해 베네치아는 동방무역을 주도하는 유럽의 경제 중심지라는 지위를 연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눈부신 외교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가 추세적 쇠락이란 역사적 운명 자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 도시들이 동방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상황을 수세기 동안 지켜본 유럽의 군주들은 아시아로 통하는 새 교역로를 개척하려는 야망을 키워 왔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됐다는 소식은 이 야망을 실천으로 옮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군주들로부터 후원을 약속받은 탐험가들이 가장 먼저 새 항로의 개척이라는 벤처사업에 몸을 던졌다. 이들의 성공 소식은 곧 다른 나라 군주와 탐험가들을 자극했고, 머지않아 유럽의 상인들이 장거리 무역을 주도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에 대한 아시아의 우위를 보여 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영향은 메흐메트 2세가 생각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게 흘렀다. 유럽이 대항해 시대의 주역으로 나서게 됐고, 결국 이것이 세계의 경제적·기술적·군사적 무게 추를 아시아에서 유럽 쪽으로 이동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역사는 실로 승자가 패자로 되고 패자가 승자로 바뀌는 반전의 연속이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회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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