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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박찬숙 방송인·전 국회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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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중략)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중략)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 김남조(1927~ ) ‘생명’ 중에서

내 어리석음을 속죄해주는 시
의인이 걸어간 길을 묵상한다

1970년대 초로 기억한다. 이경재(1926~98) 신부님이 나를 보자고 하셨다.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성 라자로 마을’을 지으려 하는데 함께하자는 권유셨다. 마음이 어렸던 나는 “신부님, 제가 신자도 아니고 잘 모르겠어요”라며 은밀하게 거절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2013년, 내가 속해 있는 예장로터리 모임이 경기도 의왕 성 라자로 마을로 봉사를 가게 됐다. 프로그램을 짜면서 나도 시 낭송 하나를 맡았다. 주저 없이 김남조 시인의 ‘생명’을 골랐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이경재 신부님이 이 땅에 뿌리고 가신 정신이 바로 이 구절이 아닌가 싶어서 울컥했다. 신부님 흉상 앞에서 ‘제가 너무 어리석어서 잘못했습니다’ 말씀드렸다. ‘생명’은 신부님이 남기신 발자취를 기억하게 만드는 시다. 라자로 마을 식구들 앞에서 몇 십 년 전 속 좁은 내 처사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울먹이며 낭송하던 기억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박찬숙 방송인·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