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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10) 서진근 하늘교육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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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높은 교육열, 아니 과도한 사교육 열기는 대체 언제 시작된 걸까. 1980년 정부의 과외금지 조치까지 나온 걸 보면 이미 70년대에 사교육의 폐해가 만만치 않았을 거라는 건 익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입시를 위한 학원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학원강사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지금의 노량진 학원가를 일군 중앙학원(현 하늘교육탑코리아학원) 서진근(79) 회장을 만나 한국 사교육업계의 흥망성쇠사를 돌아봤다.

‘수포자’였던 장안 최고의 수학 선생

일제 때인 1935년 세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서진근 회장은 서울 돈암동에서 자랐다. 친구들보다 1년 먼저 학교에 들어가 소학교(현 초등학교) 5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아버지 서종균(1904~89)씨는 한 버스여객사에 근무하다 광복 후 일제가 설립한 상호은행(현 우리은행) 명동지점 대출부 계장(※현재의 부장급)으로 재직했기 때문에 서회장 가족은 경제적 형편이 꽤 좋았다. 경동중·고 인근 ㄷ자 한옥집에서 살았는데, 마당은 넓고 방은 5개나 됐다. 하지만 서 회장이 경동중 2학년이던 48년 시련이 닥쳤다. 아버지 승인으로 거액대출을 받은 대전의 사업가가 돈을 갚지 않고 목숨을 끊은 것이다. 아버지가 책임을 져야 했고, 할 수 없이 집을 팔아야 했다. 그날로 온 가족이 단칸방 살이를 시작했다.

가난은 학업에도 지장을 줬다. 눈이 나빴지만 안경 살 돈조차 없어 학교에 가면 눈 뜬 장님 신세였다. 그나마 지리 같은 과목은 선생님 설명만 들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수학이었다. 칠판에 쓴 공식을 볼 수 없으니 수업을 따라가는 게 불가능했다. 서 회장은 “내성적이라 차마 안 보인다는 말도 못하고 맨 뒷자리에 앉아 수학은 수업을 포기할 때가 많았다”며 “고등학교 1학년 때 기본적인 인수분해도 할 줄 몰랐다”고 회고했다. 70년대 권력 있고 돈 있는 집 사모님들이 줄 서서 찾던 천하의 수학 과외 선생 서진근이 학창시절엔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사람)였던 거다.

한국전쟁 당시 어머니 박은순(가운데)씨는 서 회장 피란길에 생필품보다 수학책을 먼저 챙겼을 정도로교육열이 강했다. 손주들과 함께 한 어머니.

인생을 바꾼 피란길 수학책 한 권

서 회장이 고1 때 6·25전쟁이 터졌다. 온 가족이 경기 수원 일왕면(현 의왕시)의 이모 집에 가서 6개월여를 숨어 지냈다. 제때 피란을 못 가 임시방편으로 숨을 곳을 찾은 거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 가깝게 지내던 육군 중위 사촌 형이 찾아와 “트럭 짐더미에 사람 한 명 태울 공간이 있다”고 제안했다. 서 회장 어머니 박은순(1910~99)씨는 막내 아들한테 책가방 하나 들려서 무조건 트럭에 태웠다. 1·4 후퇴(※1951년 1월 4일 중국 인민군 개입으로 서울에서 철수한 일)를 한달여 앞둔 50년 12월 일이다.

엉겁결에 혼자 부산까지 내려가 경남 마산의 고모 집을 찾아갔다. 책가방엔 생필품이 아니라 총 400여 쪽에 달하는 『알기 쉬운 대수학』(정의택 저)이란 고교 수학교재가 들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 같은 책인데, 교육열 높은 어머니가 “전쟁통에 혼자 살아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어렵게 수학책을 구해 넣은 거다.

서 회장은 “학교에 다닐 수 없으니 집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이 책만 읽었다”며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으니 미적분부터 확률·통계까지 빠삭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은 석 달 뒤 마산에 내려왔는데 그때까지 이 책을 정확히 네 번 정독했다고 한다.

때마침 피란 내려온 경동고 교사들이 부산에 임시 학교를 세웠고, 서 회장은 더 이상 독학을 하지 않아도 됐다. 서울 살 때와는 수학 실력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수학 시험을 보기만 하면 무조건 만점이있다. 교사들이 “전쟁통에 어떻게 이런 인재가 나왔냐”고 흥분할 정도였다. 학교 명예를 위해 의대에 가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53년 당시 잠시 부산으로 와 있던 서울대 공대 광산과(현 자원공학과)에 들어갔다. 막연히 여행 다니며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원과 학교를 휘어잡은 수학의 신

전쟁이 끝난 후 가족들은 서울로 다시 돌아와서도 생계는 어려웠다. 물론 다들 힘들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특히 그의 아버지가 대출 사고를 냈다는 소문이 쫙 퍼진 탓에 아버지를 받아 주는 곳이 없었던 거다. 나중에 홍익대 미대를 나와 미술교사가 된 네 살 위 형은 당시엔 돈 못 버는 직업군인이라 막내 아들인 서 회장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사실 서회장은 별로 어렵지 않게 돈을 벌 수 있었다. 쟁쟁한 수학 실력, 게다가 서울대생이라는 간판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2학년 때인 54년 서대문의 한 학원에서 고교생을 가르치는 수학 강사를 했다. 이때부터 ‘수학은 서진근’이라는 명성이 싹 트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나 돈을 좀 만지게 되자 55년에 아예 돈암동에 동도학원이라는 학원을 직접 차려 대학 졸업 때까지 학업과 병행했다. 당시 이 학원 수강생 중엔 나중에 총리 후보자로도 올랐던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도 있었다. 서 회장은 “학업에 집중할 수 없으니 성적표가 C와 D로 가득찰 정도로 학점이 형편없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사업수완도 좋지 않아 빚만 잔뜩 지고 학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하지만 이때 키운 수학 강의 실력 덕분에 교원 자격증 없이 고교 교사로 취업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군 전역을 두 달 앞둔 60년 1월 친분이 있던 목사의 추천으로 미션스쿨인 서울 대광고 교사가 됐다. 여기서 동갑내기인 용산 남정국(현 남정초) 교사였던 아내 정태월씨와 만났다. 정씨는 당시 한 판사와 약혼한 사이였지만 우연히 만난 서 회장에게로 마음을 돌렸고, 이후 두 사람은 사남매를 함께 키웠다. 1년 남짓 짧은 대광고 교사를 거쳐 이후 동성고(61~62년)와 경기여고(63~69년)에서도 학생을 가르쳤다.

경기여고 선생을 하게 된 사연이 재밌다. 대학 은사인 박경찬 교수가 “기왕 하려면 명문학교에서 하라”며 박정희 대통령 사촌 처남의 아내인 당시 경기여고 주월영 교장에게 데리고 갔다. 알고보니 주 교장이 서 회장 어머니와 경북여고 전신인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동창이었다. “너 내일부터 경기여고로 나와라.” 경기여고에서 그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가 일본 입시문제를 번역해 만든 『경향과 대책』은 『수학의 정석』만큼 유명했다. 심지어 교장 부탁으로 그 집 아들을 가르칠 정도였다.

  

아내 정태월(오른쪽)씨는 학원 사업까지 함께 한,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였다. 하지만 지난해 머리를 다쳐 2년째 식물인간 상태다.

‘노량진의 기적’

경기여고에 재직하며 번 돈으로 짧은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명지대에서 잠시 강사를 하다 78년 본격적으로 학원을 시작했다. 당시 학원을 하려면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야 했는데 경쟁이 워낙 심하다보니 쉽게 학원 인가증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영등포의 검정고시 학원인 ‘중앙고시학원’ 인가증을 3000만원(현 2억424만원) 주고 샀다. 여기에 보증금 3500만원에 월세 200만원씩 내고 중앙학원으로 이름을 바꿔 아내와 함께 운영했다. 그때는 값이 싸 인수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한국전쟁 당시 세워진 서울 시내 1호 학원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교육청엔 서회장의 하늘교육탑코리아학원이 1호 학원으로 등록돼 있다.

이번에도 학원 경영은 녹록치 않았다. 60년대부터 이미 학원가를 꽉 잡았던 대성·종로학원의 명성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서 회장은 “강사 실력과 학원 운영은 별개 문제”라며 “직원 월급도 못 줄 정도로 어려워 폐업까지 고민했다”고 기억했다. 고민 끝에 6개월 만인 79년 2월 현재 본원이 있는 노량진역으로 옮겼지만 이곳에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인건비를 포함해 매달 1000만원이나 손해를 봤다.

그런데 뜻밖에 호재가 생겼다. 이 해에 건설부(현 국토교통부)가 “도심 혼잡을 유발한다”며 각 학원의 사대문 밖 이전을 명령한 것이다. 대성학원을 비롯해 유명 학원이 교통 편리하고 임대료까지 저렴한 노량진으로 몰려왔다. 당시 대성학원은 입학시험까지 받으며 재수생을 받을 정도로 유명했는데, 대성학원에 떨어진 학생 수천여 명이 중앙학원을 비롯한 인근 중소 학원에 몰렸다. 서회장은 “대성학원 못 간 학생을 상대로 열심히 홍보해가며 데려왔다”며 “이때부터 매달 7000만~8000만원 흑자를 볼 정도로 매출이 급증했다”고 했다. 당시 노량진 학원가에서는 ‘노량진의 기적’이라며 아직까지 이때 얘기가 회자될 정도다.

1969년 미국 유학을 앞둔 서진근 회장이 둘째아들 진원씨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중정에 끌려간 ‘영어의 이정, 수학의 서진근’

전두환 정권의 5공화국이 출범한 80년은 한국 현대사에 많은 일이 벌어진 해다. 과외금지조치도 이 해에 시행됐다. 당시 한 언론에 ‘서울대 가려면 서진근을 잡아라’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그의 유명세는 대단했다. 과외금지조치 직전까지 학원장 신분으로 권력자와 재벌가 자녀들을 대상으로 개인과외를 했다. 모두 거절할 수 없는 쟁쟁한 집안에서 온 요청들이라 하루에 90분씩 총 13팀이나 맡을 정도였다. 서 회장은 “솔직히 너무 피로하던 차에 강제로 과외를 없애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뜻하지 못한 불똥이 튀었다. 당시 서슬 퍼랬던 중앙정보부가 유명 과외 강사를 닥치는대로 잡아들인 거다. 당시 영어는 이정(※이후 미국 이민을 가 한국에선 소식이 끊어졌다), 수학은 서진근으로 통할 정도였으니 당연히 서 회장이 이 사태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는 “동네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데 주인이 황급히 들어와 ‘밖에 당신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며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목욕탕을 나서보니 중앙정보부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긴급 체포돼 죄수복을 입고는 용산 서빙고의 한 건물의 독방에 갇혔다.(※당시 중앙정보부는 남산과 이문동 등에 흩어져 있었고, 서빙고에는 현 국군 기무사령부의 전신인 국군보안사령부가 있었다.) 누군가 10여 장이나 되는 종이뭉치를 던져주고는 “직접 자녀 과외를 한 유명 정치인과 재벌 총수 이름을 모조리 채우라”고 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얼마나 큰 고초를 겪게 될까,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런데 잡혀간지 하루도 되지 않아 새벽 2~3시쯤 풀려났다.

나중에 알고보니 서씨가 풀려나게 된 건 전두환 전 대통령 최측근과의 인연이 작동했다.

“교육엔 낙오자 없어야”

서회장은 여든의 나이에도 아직 학원경영에 나서고 있다. 물론 대표는 현재 둘째 아들 진원(47)씨가 맡고 있지만 중요한 사항의 최종 결재는 아직 서회장이 한다. 인천(94년), 강남(2001년·서초구 서초동), 강북(2006년·성북구 안암동), 송파(2008년·강동구 성내동)에 분점을 내는 등 사업 확장도 모두 그의 판단 아래 진행됐다. 중앙학원이 지난해 진원씨가 1999년 초·중생 대상으로 문을 연 하늘교육 학원에 흡수·통합돼 하늘교육탑코리아학원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사업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자녀 교육도 성공했다. 진원씨 외에 다른 삼남매는 각각 병원장, 유치원장, 성악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는 “과외 선생 덕”이라고 말했다.

“교육 사업에 힘을 쏟아붓느라 정작 내 자녀교육은 신경을 못 썼어요. 하지만 아내가 과외교사 데려다가 한 명 한 명 꼼꼼히 가르쳤지.”

아무리 사교육업계에 평생을 몸담았다지만 좀 지나친 자기 업계 홍보 아닐까.

그러나 그는 교육엔 한 명의 낙오자도 없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 사교육을 동원하는 건 오히려 긍정적이라는 뚜렷한 교육철학을 내비쳤다.

“다들 사교육이 지나친 교육열을 조장한다고 하지. 하지만 과외나 학원이 긍정적 역할도 충분히 한다고 봐. 재수생이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학원에 지내면 사실 그 자체로 탈선을 못하도록 통제하는 기능을 하거든. 우리나라가 후진국에서 지금처럼 사실상 선진국 대열에 오르게 된 것도 교육열 덕분 아니겠어.”

글=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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