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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370)|제76화 화맥인맥 월전 장우성(89)|운전 허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70년대초 나는 전남도전 심사위원으로 광주에 내려 갔다가 해남 대흥사를 구경했다.
대흥사는 완당(김정희)과 교분이 두터웠던 초의대사가 있던 절이고, 또 완당의 유묵도 있어서 꼭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소전(손재성)과 내가 대흥사에 간다니까 광주의 아산(조방원)도 따라 나섰다.
아산은 어느틈에 준비했는지 북·장구는 물론 몇 사람의 국악인까지 동원, 택시2대를 전세내서 대흥사로 보냈다.
우리가 두륜산 대흥사에 도착하니 판소리하는 사람들이 벌써 와 있었다.
개천가 여관에 여장을 풀고 그날 저넉에 풍악을 잡혔다.
여관집 여주인도 걸작이어서 재담을 잘 했다. 국악인들이 왔다니까 그녀도 덩달아 좋아했다.
그 여관에는 현당(김한영)이 장기 체재중이어서 우리 술자리에 현당도 같이 했다.
소전·아산·현당, 그리고 내가 어울린 자리에 여관 여주인까지 끼어들어 흥청거렸다. 밤새워 술을 마시면서 판소리를 들었다.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자리였다.
평상시엔 별말이 없는 아산도 흥이 나니까 한바탕 노는데 그멋이 요새 사람 같지가 않았다. 말마디나 한다는 고수를 밀어내고 아산이 손수 북채를 쥐었다.
여관 여주인이 나서서 춘향전「천자뒤풀이」를 하는데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고 구성진 가락이 마을을 잡아 당겼다.
서화가중엔 이렇듯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 더러 있다.
나와 함께 후소회에서 활동한 운전(허민)은 한학에 밝아 『동의보감』『열하일기』를 번역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천하의 한량이다. 왜정 때로 기억되는데 가야금의 명인 기산(박혜봉)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한 일이 있다.
운전이 그린 그림을 기산이 요정에 내다팔아 5백원의 거액을 마련, 즐거운 여행을 했다.
금강산 천일각에서 한달보름이나 유숙하면서 멋들어지게 보냈다. 선유를 하다가 갑자기 기산을 부르더니 『좋은 벗과 더불어 이렇게 밝은 달밤에 흔쾌하게 취했으니 생노병사를 잊고 이대로 저승으로 가면 얼마나 좋겠나』하면서 영랑호로 뛰어들려다 거문고를 타던 기산과 기녀5명이 달려들어 붙잡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운전은 여행벽이 있었다. 걸핏하면 화구를 메고 기산에게 거문고를 들려 발길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다.
풍류를 갖추느라고 남도기생 2명·서도기생 2명씩을 몰고 다녔다.
운전은 한문실력이 뛰어나 취흥이 도도해지면 그림을 그리고는 으례 화제는 자작한 시로 써내 놓았다.
보통 때도 술이라면 어깨춤을 추던 운전이 해방의 기쁨을 이기지 못해 그가 머무르고 있던 경남사천군 곤양면 다솔사에서 소정(변관식) 내고(박생광) 요당(최범구) 청남(오제봉)과 함께 진주시내에 나와 몇차례를 마셨는지 곤드레가 되어 개에 물린 얘기를 들으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뭐니뭐니해도 기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데 부인을 시켜 술상을 차려오게 했던 일, 그를 좋아하던 기녀가 북간도로 떠나면서 5원을 내주며 『이 돈으로 술 사잡수시고 제 생각 해달라』고 한 일은 운전의 멋진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양화가인 수화도 풍류가 있는 사람이다. 고서화나 도자기도 좋은 걸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한 친구였다.
그의 그림에 매화·학·항아리등이 많은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소박한 한국의 멋을 좋아했는지 알만하다.
그가 애써 서화 골동품을 수집할 때도 친구가 갖고 싶어하면 선뜻 『좋으면 가져가』 하고 아끼던 물건을 내주었다.
글도 잘 쓰지만 글씨도 멋들어지게 썼다. 그의 펜글씨는 알아주는바다.
서예가인 추당 정현복도 소문난 한량이다. 나와는 남달리 친하게 지냈지만 그의 장구솜씨는 전문가들도 알아주던 터였다.
두주를 불사하던 주호였지만 만년에는 술 때문에 병을 얻어 그 좋아하던 술을 마시지 못했다.
그래도 놀던 가락이 있어 누가 부추기면 『까것거, 살면 몇백년 산다고. 그래 한잔하지』하는 소탈한 사람이었다.
검여(유희강)도 선풍도골이다. 술이라면 청탁을 가리지 않던 그가 병으로 금주령을 받았을 때 『술 없이 무슨 재미로 산담』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의 곧은 성품은 진짜 선비다운 면모를 보였다. 검여는 입버릇처럼 황매천의 선비정신을 치켜 세웠다. 뇌일혈로 쓰러져서도 끈질긴 노력으로 좌수서룰 써 새로운 서예의 경지를 이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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