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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말만 듣고 통과 … 단통법 혼란 부른 '청부입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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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단통법)의 첫 법안심사소위가 열린 지난해 12월 23일 국회 소회의실. 새누리당 조해진·권은희 의원 등이 미래창조과학부와 방송통신위원회 공무원들에게 질문했다.

 ▶조 의원=“(제조사에) 장려금을 받은 이통 3사가 그 내역을 다 손에 쥐고 있나, 샐 가능성은 없나.”

 ▶미래부 김주한 통신정책국장=“계약에 의해 지켜질 수 있다.”

 ▶권 의원=“애플에도 법을 적용할 수 있나.”

 ▶김 국장=“그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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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조 의원 등은 방통위의 김충식 부위원장과 미래부의 윤종록 제2차관, 김 국장, 홍진배 통신이용제도과장 등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의원 질의→실무자 답변’ 형식의 질의응답은 A4용지 18쪽 분량에 달했다. 단통법 발의자는 조 의원과 권 의원을 비롯한 10명이다. 하지만 법안 발의자인 조 의원이 법안심사소위에서 질문을 퍼부은 건 이례적이다. 사정이 있다. 단통법이 ‘청부 입법’이기 때문이다. 정부 입법을 하려면 법안 제출까지 8~9개 절차를 거쳐야 한다. 보통 6~8개월이 걸린다. 반면 의원 입법은 의원 10명 이상만 찬성하면 즉시 법안을 낼 수 있다. 까다로운 규제 심사나 부처 내 예산문제도 피할 수 있다. 그러니 정부가 의원 이름을 빌려 법안을 발의하는 ‘청부 입법’이 횡행한다.

 최근 시행된 단통법의 혼란도 청부 입법의 폐해라는 지적이 많다. 실제 법안을 준비한 정부가 소비자 입장보다는 통신사·제조사 입장에 주로 귀를 기울였다는 점에서다. 청부 입법은 최근 들어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월 직접 화이트보드에 구상을 그려 가며 심혈을 기울였던 규제정보 포털의 ‘법령관리’ 코너에는 ‘의원 입법’ 132개와 이로 인한 규제조항 290개(26일 기준)를 소개했다. 반면 ‘정부 입법’의 경우 “현재 준비 중”이라는 안내문구만 있다. 규제와 관련된 법안이 대부분 정부 입법보다는 의원 입법의 방식으로 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통법만 해도 규제가 핵심이지만 정부 입법으로 잡히지 않는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반드시 통과시켜야 할 법안”으로 꼽은 30개 경제활성화 법안 중 크루즈산업 육성·지원법안 등 20개도 의원 입법이다. 물론 정부만 탓할 순 없다. 정부 입법은 발의뿐 아니라 통과까지 걸리는 시간도 길다. ‘내 법안’이 아니기 때문에 적극 나서는 의원이 없어서다.

 김무성 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가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의원 입법으로 추진하는 것도 개혁의 시급성과 법안 통과에 대한 책임을 고려한 포석이란 게 새누리당의 설명이다.

그러나 무분별한 청부 입법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해경 출신들이 수상레저안전협회에 재취업할 수 있는 근거를 규정, ‘관피아’ 통로를 만들어줬다고 비판받은 수상레저안전법 등이 그런 사례다. 정부가 이익집단 간 갈등을 조정하지 않고 청부 입법을 해 사회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청부 입법은 빠른 법안 처리를 위한 정부와 실적을 갖기 위한 의원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하는 것”이라며 “법안 처리에 속도를 내는 건 좋지만 특정 집단의 이익만 반영되는 식은 안 된다”고 말했다.

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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