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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글 비평만 250권 … 이제 내 글, 나를 위해 쓰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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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서울 이촌로 자택 서재의 김윤식씨. 김씨는 책상에 조그만 변화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집중력 있게 작업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신문지를 전등갓 삼아 씌운 이유도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김씨는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야기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문학평론가 김윤식(78·서울대 명예교수)씨의 서울 이촌로 자택은 오래된 것들로 가득하다. 누렇게 빛바랜 수백 권의 문학책들, 20년 전 메모지…. 아침 저녁 체중 변화를 기록하는 작은 수첩까지 누런 갱지다. 부인 가정혜(77)씨는 “평소 체중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가면 식사량을 줄이고 덜 나가면 더 먹기 위해 기록한다”고 소개했다.

 요컨대 수십 년을 한결같이 엄격하게 자기 관리를 해왔다는 얘기다. 그것 말고는 김윤식의 문학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듯싶다. 그가 일간지에 연재한 칼럼을 모아 최근 『문학을 걷다』(그린비)를 펴냈다. 지난 21일 그를 찾아 몇 번째 책이냐고 물었더니 “공저를 포함하면 지금까지 250권쯤 된다”고 했다.

 그는 서울대 국문과 박사학위 논문을 다듬어 1973년에 펴낸 저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에서 당시 금기시하던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를 다뤘다. 이같은 작업을 통해 그는 근대문학 연구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각종 문예지에 발표되는 단편소설을 실시간으로 읽어내는 ‘현장 비평’ 또한 그의 주무대다. 소설가 윤대녕·김애란의 가치를 가장 먼저 읽어냈고, 80년대를 회고하는 90년대 소설에 ‘후일담 문학’이라는 꼬리표를 단 것도 그다. 무엇보다 그는 “요즘도 하루 종일 소설을 읽고 매일 원고지 10쪽 분량의 글을 쓴다”고 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하루도 쉬지 않고 읽고 쓰게 하는 것일까. 그가 일본 최고의 문학평론가로 꼽히는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1902∼83), 인물 평전으로 유명한 에토 준(江藤淳·1932∼99) 등의 영향을 받은 사실은 알려져 있다. “비평은 교묘한 칭찬”이라는 소신이 고바야시의 영향이라면, 치열한 글쓰기는 에토 준과 관계가 있다.

 “하루는 에토 준에게 ‘좋은 글은 도대체 어떻게 써요’라고 물었더니 ‘강아지를 키우라’고 해요. 자식도 없이 강아지 키우는 일 이외에는 온통 글쓰기에 매달려야 뭔가 쓸 수 있다는 얘기였지요.”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김씨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심어 놓은 ‘조선인은 열등한 민족’이라는 식민사관을 극복하자는 생각에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루카치·헤겔 등을 읽으며 근대를 공부했고 그러다 본격적인 소설 연구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문학 안에서 한국적인 근대를 찾으려 했다는 얘기다. 그 최초의 단서가 카프임은 물론이다. 이후 그가 읽어낸 무수한 근·현대 소설들은 우리 안의 근대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물증, 일종의 알리바이인 셈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읽고 쓰는 일 이외에 그에게 어떤 꿈이 있을까.

 “뭐, 별로 없다”고 손사래를 치던 그는 “꿈이 하나 있다면 내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여태까지 쓴 글은 내 글이 아니었다. 남의 글에 대해서만 쓰지 않았나. 이제는 내 글, 나를 위한 글을 쓰다 죽었으면 좋겠다. 시가 될지 에세이가 될지 모르지만 나만 쓸 수 있는 글 말이다. 창작을 말하는 거냐고? 물론이다.”

 언젠가 김씨는 평론가의 운명을 묘지기, 평론작업을 ‘시체 빌려주기’로 표현한 바 있다. 죽어 있는 작품에 자신의 뜨거운 피와 입김을 불어넣어 생기를 돌게 하는 작업, 그게 평론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원숙한 평론가가 새로운 생명 창조의 주인이 되는 창작을 꿈꾸고 있었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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