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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연금 개혁은 정권을 거는 모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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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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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박근혜 정권이 추진하는 공무원연금 수술은 정권을 말아먹는 자해 행위일 수 있습니다. 연금 개혁이 실패하면 정권의 작동은 시나브로 중지될 겁니다. 대통령의 말은 공무원 사회부터 먹히지 않게 됩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책임 전가에 바빠지겠죠. 대통령은 우습게 보이고 집권 3년도 안 돼 레임덕에 시달릴 게 불 보듯 환합니다. 개혁이 성공하더라도 정권 재창출에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세상에 못할 일이 줬다 뺏는 거 아니겠습니까. 받은 혜택은 잊어도 뺏긴 기억은 오래 가는 법입니다. 그래서 연금 개혁을 주도하는 정권은 재임에 실패하곤 합니다. 2005년 독일 총선에서 앙겔라 메르켈에게 정권을 빼앗긴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그런 경우입니다.

 통일의 후유증으로 슈뢰더의 독일은 유럽의 병자로 전락했습니다. 2002년 독일의 성장률은 0.0%로 정지했습니다. 재정 곳간은 비었고 실업자는 거리에 넘쳐났습니다. 사회민주당의 이론가이자 ‘역사상 가장 좌파적인 총리’로 예견됐던 슈뢰더는 전통적 지지계층인 노조와 연금 생활자 세력을 배반했습니다. 오늘날 독일을 유럽의 구원자로 변모시킨 ‘어젠다 2010’을 밀어붙였죠. 병약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다는 국가 혁신계획이었습니다. 국민연금의 수령액을 낮추고 수령 나이를 두 살 늦추는(65→67세) 개혁안이 포함돼 있습니다.

 슈뢰더의 사민당은 핵심 지지층의 저항과 이탈로 당이 쪼개졌습니다.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습니다. 대신 어젠다 2010은 기독교민주당의 메르켈 총리가 충실하게 이어갔습니다. 그는 아예 국가혁신안을 실천할 경제·노동 장관을 사민당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이른바 대연정 내각을 구성한 겁니다. 우리 같은 승자 독식의 정치체제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슈뢰더의 어젠다 2010 개혁의 동력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한 줄 메시지에서 비롯됐습니다. ‘독일을 살리기 위해 사회주의를 버린다’는 언어였죠. 그는 “독일을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사회주의 정책을 버리고 시장경제 정책을 실시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당을 희생해서라도 나라를 구한다는 개념엔 비장미가 묻어납니다.

 개혁의 성패는 모름지기 빛나는 언어, 간명한 메시지에서 출발합니다. 개혁을 왜 해야 하는지, 국민에게 한 번에 다가가는 한 줄 언어를 개발해야 합니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국민의 힘으로 이뤄내야 합니다. 공무원은 숫자가 100만이 넘고 그들의 연금은 교사· 군인연금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가족까지 치면 이해관계자 수백만 명에 달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응집력이 강한 이익집단입니다. 이들의 격렬한 저항과 이탈을 설득하거나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국민입니다. 왜 공무원연금을 개혁해야 할까. 여기에 답하는 빛나는 언어, 간명한 논리가 생산돼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집권세력이 내놨던 개혁 당위론은 전문가가 쓴 교과서일망정 국민의 마음을 흔드는 시적 감동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공무원연금 체제를 유지하려면 국민 세금을 10년간 53조원 쏟아부어야 한다고 합니다. 연평균 5조3000억원을 재정 곳간에서 갖다 쓴다는 얘기죠. 당장 돈이 없다고 내년부터 실시가 불투명해진 0~5세 보육비의 1년 예산이 5조원입니다. 대학생들의 이른바 ‘반값 등록금’ 예산은 3조5000억원 정도입니다. 공무원 연금을 수술하면 보육비나 반값 등록금 문제는 싹 해결되고도 남는다는 얘기입니다. 국민의 마음을 모을 빛나는 언어는 이 지점에서 도출될 수 있을 겁니다. 개혁의 추진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정권입니다. ‘정권을 잃어도 할 수 없다’는 굳은 결의가 있다면 이것을 투박하게 표현해도 국민에게 감동을 줄 겁니다. 공무원들에게 하후상박과 봉급 인상 등의 보상책만으론 부족합니다. 그들의 애국심과 자부심에 호소하는 보석 같은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정권을 건 이런 개혁을 성사시켜야 국가 지도자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에게 비행기의 좌석 등급을 정해주는 게 혁신은 아니죠.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하겠다는 국가 혁신론은 먼저 공무원연금 개혁으로 진실성을 입증해 보인 뒤에야 비로소 허무함을 면할 수 있을 겁니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