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힐튼호텔·역도경기장·SK빌딩 … 그 자리 명품이 된 건축을 빚다

중앙일보

입력 2014.10.25 00:42

업데이트 2014.10.25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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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나이 일흔아홉에 그처럼 흐트러지지 않고 단정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를 만나고 문득 들었던 의문이다. 푸른빛이 도는 셔츠에 재킷, 테두리가 동그란 갈색 뿔테 안경, 그리고 잘 빗어넘긴 머리가 눈에 띄었다. 말투도 그런 차림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30년 전 얘기를 하면서 마치 어제 일처럼 연도를 빠뜨리지 않고 언급했고, 설계작에 대해 얘기할 때 너비·높이 등의 수치가 정확한 미터(m) 단위로 튀어나왔다. 엄격한 면모가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과해 보이지 않았다.

 ‘한국 건축계의 살아 있는 전설’ ‘한국 건축의 교과서’라 불리는 건축가 김종성(79·서울건축 명예대표)씨 얘기다. 43세에 서울 힐튼호텔을, 48세에 육군사관학교 도서관을, 그리고 50세에 부산 파라다이스 비치호텔을 설계했다. 서울 올림픽공원 내 역도경기장(현 우리금융 아트홀), 경희궁 터에 자리한 서울역사박물관, 서린동 SK빌딩, 경주 선재미술관(현 우양미술관)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건축가와 비평가 등 전문가들은 그의 설계작 하나하나를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는다. 호텔·경기장·연구소·뮤지엄 건축설계를 논할 때 피해갈 수 없는 ‘명품’ 사례들이라는 것이다. 한양대 건축과 정인하 교수는 “김종성은 국내에서 일관되게 자신의 건축세계를 구축한 드문 건축가”라며 “그의 건축에는 과학정신에 입각한 탄탄한 논리가 뒷받침돼 있다”고 평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정형민)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조화- 건축가 김종성’전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정기용·이타미 준 회고전에 이어 세 번째 전시인데, 살아 있는 건축가가 이곳에서 조명을 받는 것은 그가 처음이다. 건축 인생 50년을 그는 어떻게 돌아볼까.

 - 국립미술관에서 생존 건축가로서는 첫음 여는 회고전이다.

 “큰 영광이고 소중한 기회다. 덕분에 지금까지 해온 작업을 정리할 수 있었고 늦게나마 대중과 만날 수 있게 됐다. 건축이 머나먼 얘기가 아니라 우리 주위에 얼마나 가까이에 있었는지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좋겠다.”

 그의 첫 회고전을 기획하고 연 것은 세계적인 건축 전문 전시관인 독일 베를린 아에데스 갤러리였다. 2006년 아에데스 전시가 그의 건축을 연대별로 조명했다면, 이번 전시는 ‘오피스 빌딩’ ‘뮤지엄’ ‘장(長)스팬(long- span)’ 등으로 건축물 성격에 따라 나눠 구성했다.

 - ‘장스팬’ 건축이란 말은 좀 어렵게 들린다.

 “용어는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장스팬 건물과 친숙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웃음). 예컨대 실내 경기장이나 콘서트홀은 전부 장스팬이다. 보와 보 사이 간격이 길고 중간에 기둥이 없는 건물을 말한다. 내가 설계한 장스팬은 서울 역도경기장과 부산 2002년 아시안게임 경기장 등 두 곳에 불과하지만 내 건축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 경기장 건물은 구조물처럼 보이는데.

 “장스팬은 구조 자체가 건축 디자인이 되는 것이다. 구조를 진실하게 표현하는 것, 그게 장스팬 건축의 진수다. 여기에 디자인을 덧붙이면 아름다움이 희석된다. 그동안 내가 추구해 온 건 구조 자체가 건축이 되고 예술이 되는 건축이었다. 여기에 핵심은 테크놀로지다. 테크놀로지는 시대정신을 드러내고 건축을 예술로 끌어올리는 중요한 동력이다.”

  그의 독특한 건축 철학은 세계 현대 건축의 거장이라 불리는 독일 출신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1886~1969)와의 인연과 관계가 깊다. 1954년 서울대에 입학한 그는 56년 미국 일리노이공대(IIT)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적을수록 풍요롭다(Less is More)’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는 디자인 철학으로 유명한 미스(Mies)를 만났고,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스의 건축사무소에서 11년을 근무했다.

 - 전쟁통에 고교 시절을 보냈다. 어떻게 건축가가 되기로 결정했나.

 “건축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6·25 때 부산 피난학교에서 서울로 올라와 천막 교사에서 대학 진로를 정할 때였다. 건축이 뭔지도 몰랐지만 폐허에서 무엇인가를 짓는 것이 좋은 공부라고 생각했다.”

 설계 일을 시작하고 나서 역사에서 배운 건축물을 직접 볼 수 있었다는 그는 자신에게 첫 감동과 희열을 안겨준 건축물로 프랑스 아미앵(Amiens) 대성당을 꼽았다.

 - 마흔세 살에 힐튼호텔을 설계했다.

 “이 호텔 설계를 계기로 일리노이공대 교수직을 떠났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프로젝트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호텔 설계 경험이 없는 내게 일을 맡겼는데 지금 돌아보면 상상하기 힘든 용단이다. 힐튼호텔도, 고(故) 전락원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이 설계를 맡긴 부산 파라다이스 비치호텔도 건축가인 나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일을 맡겨준 경우로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서울대 건축과 김승회 교수는 “서울 힐튼호텔은 세계 힐튼호텔 중에서도 거의 베스트로 꼽힌다”며 “그는 한국 건축을 국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힐튼호텔에 대해 건축가 자신의 평가에도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그는 “경사진 대지를 활용해 18m 높이가 수직으로 연결되는 아트리움(atrium·건물 내부 중앙의 안마당 같은 공간)은 지금 봐도 뿌듯하다”고 했다. SK빌딩에 대해선 "테크놀로지를 순수한 상태로 정제하는 데 주력한 건물”이라고 소개했다. 가장 맘에 드는 프로젝트로는 경주 ‘우양미술관’(구 선재미술관)을 꼽았다. “폭 20m, 길이 45m 되는 2층 전시실은 쓰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다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가능성을 남겨두었다”고 했다.

 요즘 건축을 그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더니 “건축이라기보다 풍경의 하나로 본다”며 “아직 시간의 테스트가 남아 있다. 앞으로 10~20년간 어떻게 운영하느냐가 DDP의 성패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자신이 주목한 현대 건축물로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 꿈마루(조성룡 설계)와 서울 자곡동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이성관 설계)을 꼽았다.

 좋은 건축이란 어떤 것일까.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물었다. “건축에도 진실이란 게 있어요. 그 진실을 드러내 주는 것은 결국 시간이죠. 처음 봤을 땐 ‘우와’ 하지만 1년만 지나도 빛바래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미지·형태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진부해 보이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던 건물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 그것이 좋은 건축입니다.” 구조와 기능, 아름다움이 일치해야 한다고 그가 강조했던 이유가 이 답변에 다 들어 있었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김종성은

1935년 서울 출생. 경기고 졸업. 서울대 건축학과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공대(IIT) 건축학과에 들어갔다. 61~72년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사무소에서 근무하며 캐나다 토론토 도미니언센터 프로젝트 등에 참여했다. 66~78년 IIT 건축대학 교수, 72~78년 IIT 건축대학 학장 서리 역임. 78년 귀국해 서울건축(SAC)을 설립했다. 대표작은 부산 파라다이스 비치호텔·서울대박물관·서울역사박물관 등이다.

[S BOX] 단순·비례·민낯 … 한국 4대 고건축 공통점

김종성씨는 틈이 나면 한국 고건축을 답사하러 다닌다. 현대 건축에 50여 년의 시간을 바쳤지만, 중국이나 일본 건축 또는 서양 건축이 주지 못하는 감동과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우리 고건축으로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전남 구례의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 충남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을 꼽는다. 구조가 단순·명료하며 긴 변과 짧은 변의 비례가 아름답기 때문이란다. 또 단청 없이 민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도 닮은 매력이다. 그는 서울의 종묘 정전(국보 제227호) 역시 우리 고건축의 걸작이라고 덧붙였다.

 ① 부석사 무량수전=비례미의 극치에 합작지붕이 갖는 정형미까지 갖추고 있다. 무량수전은 어느 한 부분이든 변형시키면 그 정형미를 잃게 될 정도로 조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② 화엄사 각황전(사진)=안에 들어가 보라. 나무 부재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맞물려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③ 수덕사 대웅전=측면에 지붕면 테두리(내림마루)가 보이는 맞배지붕 구조다. 측면이 보여주는 목재 배치의 형식이 불전 안에서 일어나는 목재 결구를 그대로 보여주는 구조미의 진수를 보여준다.

 ④ 종묘 정전=이곳의 아름다움은 열아홉 칸 기둥의 리듬, 그것이 받치고 있는 지붕의 조화에서 온다. 한 외국 건축가는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차원의 탁월한 건축이라고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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