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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8>|청주좌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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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제주에서 발원한 성씨라면 흔히 고·부·양 3성을 꼽는다. 그러나 3성외에 제주에만 7백여 년을 뿌리내려 살아온 또 하나의 성씨가 있다는 사실은 정작 제주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청주 좌씨-. 인구순으로 1백32위. 전국에 모두 1천여 가구가「한집안」인데 그중 8백여 가구가 제주에 산다. 외지에 사는 2백여 가구도 불과60여 년 안쪽에 나간 사람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좌씨는 오직 제주에만 존재하는 귀한 성이었다.
청주 단 일본에 단일파. 시조로부터 21세를 내려오는 제보가 희성답게 은행나무가지처럼 단순 명료하다.
제주에 뿌리를 두었으면서 제주 아닌 청주를 본관으로 쓴다. 그 내력이 그대로 좌씨 가문의 역사다.
시조는 고려중엽 중국에서 건너온 좌형소. 그러나 형소의 시조, 그러니까 좌씨 성의 원 시조는 중국춘추전국시대 노나라의 태사 좌구명으로 돼있다. 유명한『춘추좌씨전』과『국어』의 저자인 대사학자이자 유학자. 후배인 공자조차도 큰 영향을 받고 존경했다는 인물이다.
「대문호의 후손, 역대로 수 없는 문무의 인물을 배출한 중원의 명문거족」이라는 것이 좌씨의 높은 긍지다.
형소는 좌구명의 67대손, 7백여 년 전 원 나라에 중국 변경(지금은 하남성 개봉) 에 살았다고 한다.
중원 명문가의 후예인 그가 수륙만리 남해의 고도 제주에까지 와 한국 좌씨의 시조로 기록된 것은 13세기동양사의 풍운이 배경이 돼있다.
긴 세월 알타이에서 흥안령에 이르는 광대한 아시아의 초원에서 유목에 종사하던 몽고족은 「친기즈칸」이라는 군사적 천재의 출현으로 세계를 뒤흔들게 된다.
「친기즈칸」의 영도 아래 몽고 기병은 유라시아대륙용 멍식말이하고 역사상 유래 없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의 한족을 정복하고 60여 년에 걸쳐 끈질지게 항거하는 고려마저 끝내 부속시켰다.
고려 삼별초무사들의 마지막 저항을 제주에서 진압한 원은 1273년(고려 원종14년) 6윌 제주에 「탐나총관부」를 설치했다. 일본정벌의 전초기지로 착안한 것이다. 천연의 목초지를 보고 2년 후 목마장을 개설, 몽고의 전마을 들여다 사육시켜 군수에 대도록 했다.
좌형소는 그때 정복자인 원나라 조정에 벼슬, 이 목마장의 감목관으로 파견됐다.
『…탐나에 마신을 주관하는 큰 별의 정기가 깃든 들이 있음을 보시고 말을 거느리고 탐나에 오셔서 방목하시니 탐나의 좌씨는 이에서 비롯한다….』
족보에 기록된 시조 형소의 입도기.
그때 들여온 몽고말의 후손이 오늘의 제주도 조랑말이고 보면 그는 우리 나라 좌씨의 시조일 뿐 아니라「제주 조랑말의 아버지」, 「제주 목부의 원조」인 셈이다.
『감목관이라면 요즘 목장관리 책임자쯤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관할 구역 내 일반 행정까지 도맡아하던 일종의 통치기관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원은 청주를 직할통치하며 총독 격인「달로화치」밑에 단사관과 만호를 두었다고 기록돼 있어요. 목마장은 총관부의 핵심 사업이었던 만큼 감목관은 총관부의 중요간부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종친회 총무 좌종일씨(46·제주농고교사)의 설명.
이른바 「마신의 정기가 깃든 들」로 몽고의 목마장이 됐었던 곳은 지금도 송당 목장으로 옛 모습이 전해진다. 한라산 동쪽 기슭 북제주군 구좌면 막동리 일대. 좌씨가 제주에 첫 발을 디디고 자리잡은「고향」이기도 하다.
원의 제주통치는 근1백년 계속됐다. 좌씨는 시조이후 대대로 감목관직을 세습하며 눌러 살았다. 그리고 점차 제주도인이 돼갔다. 2세 자이 이후는 모두 한국여자와 결혼한 것으로 족보는 밝히고 있다.
5대가 좌막기.
『이름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막기라는 것은 한나라를 버린다는 뜻 아닙니까. 중국과의 유대를 끊고 완전히 한국인으로 귀화한다는 결심의 표현으로 그런 이름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좌씨 총친회회장 좌봉두씨(58·북제주군 한경면 수원국교교장)의 말대로 막기는 중국과의 인연을 끊었을 뿐 아니라 말과의 인연도 끊고 좌씨 가문을 새 출발시켰다.
좌씨 가문의 새 출발은 제주의 고려귀속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이루어졌다.
1273년 이후 고려의 영토이면서도 원의 직할통치를 받는 기이한 상태에 있던 제주도는 일본 정벌계획이 포기되고 원의 세력이 기울면서 혼란에 빠졌다. 고려가 제주의 통치권을 회복하려들자 목마장 설치를 계기로 제주에 들어왔던 몽고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목호의 난」.
1372년3월 목호 석가을비등이 고려가 파견한 목사 등을 죽이고 난을 일으키자 고려조정은 그해8월 최영장군을 삼도 도통사로 삼아 3백14척의 배에 2만5천의 대병력으로 일대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저항하는 목호의 3천 기병을 쳐부수고 몰아 지금의 서귀포 앞 바다 범섬(호도)에서 마지막 잔당을 섬멸했다. 제주에서 몽고의 세력은 일소되고 제주는 다시 고려영토로 복귀했다.
좌한기는 이때 벼슬살던 몽고 쪽을 버리고 한국인으로 귀화하는 역사적 결단을 내린 것이다.
감목관의 자리를 내놓고 입도(입도)이후 살아오던 막동리를 떠나 정반대인 제주도 서쪽 끝 한경면 두모리로 이주했다.
목축대신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삼으며 학문에 종사하는 선비집안으로 가문을 재건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 좌씨의 실질적인 시조라고도 할 수 있다.
후손 좌영조씨(43·제주여고교사)는 그러나『사람이 그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시조 형소의 유훈을 따라 본관만은 중국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산동성「청주」를 정해 썼다.
그런데 l922년 조선 호적령에 따라 호적의 일제정비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청주」라는 지명이 한국에는 없어 쓸 수가 없게 된 것. 편법으로 음이 같은 「청주」로 바뀌어 오르게 됐다는 것이다.
조선조 들어 제주도민의 육지 이주를 금하는 해금령이 내려지면서 제주의 좌씨는 육지에 나가지 못하고 제주에만 살게됐다. 좌씨의 육지 이주가 시작된 것은 일제이후 최근의 일. 현재도 제주 외에 좌씨는 서울·부산에 각50여 가구 등 모두 2백여 가구에 불과하다. 좌씨가 단1명도 안 사는 시·군이 훨씬 더 많다.
제주의 「선비 집안」으로 꼽혀온 좌씨는 조선조에 종2품 가선대부의 가작을 받은 사람이 5명, 종3품 통정대부가 l백7명, 무과 등과가 11명이나 된다고 족보는 적고 있다.
그중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선조는 2대 자이와 14대 시우, 15대 임관. 자이는 형소의 뒤를 이어2대 감목관이면서 명의였다.
이런 일화가 전한다.
고려의 왕후가 중병에 걸렸다. 백 약을 써봐도 효험이 없었다. 일관이 천문을 보고『남쪽 절해고도에 명의가 있는바 그 사람만이 왕후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상주했다. 탐나에 자이란 신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 즉시 입궐토록 했다.
왕후의 병을 진단한 자이는 그 자리에서 중약을 조제, 이을 마신 왕후는 며칠 후 완쾌했다는 것이다. 이에 탄복한 왕은 자이가 살던 막동리 일대의 토지를 하사해 지금도 일대가「좌가장」으로 불린다.
시우는 한말 철종·고종대의 인물. 유학에 밝아 제주향교의 훈장으로 많은 후생들을 길렀다.
임관은 일제 때 독학으로 의생(요즘의 한의사) 시험에 합격, 2대조 자이처럼 「명의」로 명망이 높았다. 글·문호고 기자 사진 장남원 기자

<지명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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