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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호 경사의 죽음을 기억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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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정철근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정철근
논설위원

2011년 12월 12일 새벽. 서해 소청도 남쪽 바다를 감시하던 인천해경 이청호 경사는 우리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불법 조업하는 중국 어선 2척을 발견했다. 이 경사는 고속단정을 타고 약 1시간 추격한 끝에 중국어선 루윈위호에 올라탈 수 있었다. 동료 경찰 7명과 함께 진압을 시작해 선원들을 제압했다. 하지만 선장 청모(45)씨는 조타실 문을 잠그고 도주를 시도했다. 청씨는 비상 쪽문으로 들어오려는 이낙훈 순경의 배를 흉기로 찔렀다. 이 경사는 조타실에 섬광탄을 던지고 진입했다. 그 순간 이 경사도 청씨가 휘두른 흉기에 옆구리를 찔렸다. 그는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끝내 눈을 감았다.

 선장 청씨는 현행범인데도 처음엔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구속 5일째야 죄를 인정했다. 그는 “자백하면 사형을 당할까 봐 겁이 나서 거짓말했다”고 말했다. 당시 중국 외교부는 ‘유감’이라고만 했을 뿐 ‘사과’조차 안 했다.

 2012년 4월 19일. 인천지방법원은 사형을 걱정했던 청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검찰 구형량(사형)보다 낮은 형량이었다. 하지만 판결 직후 중국 외교부 류웨이민 대변인은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과 중국은 서해에서 EEZ 경계선을 확정하지 않았고, 한국이 일방적으로 정한 EEZ를 적용한 판결”이라는 주장을 폈다.

 2014년 10월 10일. 전북 부안군 왕등도 우리 측 EEZ에서 불법 조업을 하던 중국어선 선장 송모(45)씨가 해경의 단속에 흉기로 저항하다 총에 맞아 숨졌다. 중국 외교부는 “폭력적 법집행”이라고 한국 측을 비난했다. 이번에는 자국민의 죽음을 내세워 우리 EEZ를 침범해 불법조업을 한 사실 자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제 고무총탄은 무서워하지도 않아요. 옷이 워낙 두꺼워 맞아도 아프지 않으니까. 섬광탄을 던지면 중국 선원들이 도망가는 게 아니라 멀리 차버려요. 겁을 주기 위해 조준을 하면 가슴팍을 열어 제치며 ‘쏠 테면 쏴봐라’고 맞서는 선원들도 있다니까요.”

 인천해경의 홍모 경사는 중국어선을 단속할 때 총기 사용이 불가피한 상황이 많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나라의 중국 어선 불법 조업에 대응하는 강도는 러시아·일본·베트남·필리핀은 물론 북한보다 약하다. 러시아는 2009년 밀수혐의로 가압류됐던 중국 화물선이 도주하자 군함을 동원해 격침시켰다. 베트남도 2011년 해군 함정이 불법 조업하는 중국 어선에 기관총을 쏴 나포한 적이 있다. 당시 베트남은 무장군인들이 어민들을 갑판 위에 무릎을 꿇린 채 지키고 있는 화면까지 공개했다. 이에 비해 우리 해경은 2008년 박경조 경위가 중국선원들을 진압하다 둔기에 맞아 숨진 이후에야 총기 소지를 허용했다.

 불법조업으로 나포되더라도 우리나라는 담보금(최고 2억원)만 내면 배는 물론 잡은 물고기들도 모두 돌려준다. 브라질(최고 318억원), 인도네시아(최고 26억원)에 비하면 너무 관대한 처분이다.

 현재 국회엔 EEZ 관련 4개 법률안이 계류 중이다. 해경의 무기 사용을 허용한 해양경비법 개정안도 발의돼 있다. 모두 중국어선 불법조업 대응과 관련된 법안들이다. 정당한 법 집행에도 항의하는 중국의 태도로 볼 때 분쟁 소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시급히 처리돼야 한다. 하지만 우선 순위에 밀려 상임위에서 본격적인 논의도 안 되고 있다.

 고(故) 이청호 경사 순직 당시 현장에 있었던 남형권 경장과 15일 통화가 연결됐다. 그는 이날도 경비함을 타고 동해를 지키고 있었다.

 “그날 대원들이 권총을 갖고 있었지만 사용을 안 했어요. 출렁이는 배 위에선 총이 잘 안 맞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최후의 방어수단으로 쓰거든요. 이 경사님은 매뉴얼대로 한 건데 조타실이 어두워 중국인 선장이 흉기를 갖고 있는 것을 못 본 게 지금도 안타깝습니다. 중국 선원들이 흉기를 들고 맞설 때는 단속이 아니라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철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