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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수렁에 빠진 중산층 57개월 만에 '빈곤 추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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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남편이 보증 사기를 당해 생긴 빚더미에 치여 직장을 잃고 결국 이혼까지 했습니다. 아이들을 키울 일이 막막했지만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 상계동 이정자(40.여.가명)씨는 1998년 중순까지만 해도 대구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중산층이었다. 남편은 대기업 과장, 이씨는 고등학교 교사로 부부가 월 700만원가량을 벌었다. 49평형 아파트(시가 1억5000만원)를 소유했고, 승용차 두 대를 굴리며 살았다.

그러나 남편이 컴퓨터 대리점을 하겠다며 퇴사(98년 말)한 뒤인 99년 6월 어려움이 닥쳤다. 남편이 보증 사기 등을 당하면서 5억원의 빚을 떠안은 것이다. 이씨도 빚 독촉에 시달리다 학교를 그만뒀다. 아파트를 판 돈과 퇴직금으로 빚을 갚았지만 3억원가량이 남았다.

2003년 8월 카드 돌려막기도 불가능해졌고, 생활고가 거듭돼 이혼했다. 그 해 12월 신용불량자가 되자 두 아이(12, 13세)를 친구에게 맡기고 무작정 상경했다. 일용직 청소부 생활을 하며 월 50만~60만원을 벌어 20만원을 아이들에게 보내고 있다. 하지만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어 개인파산을 신청했고 올 3월 면책 결정을 받았다.

이씨는 "4년 반 만에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서너 차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을 했지만 월소득이 최저생계비(1인 가구 40만원)를 넘는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남편 호적에 남아 있는 아이들도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로 혜택을 못 받고 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와 한국사회보장학회가 빈곤층 100명을 대상으로 면접 조사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이씨와 같은 처지의 중산층이나 서민이 빚 보증, 사업 실패 등으로 기초수급자나 차상위 계층(소득이 기초수급자의 120% 이하인 그룹)과 같은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데 평균 4년9개월이 걸린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사회봉사단의 후원으로 이뤄진 이번 조사는 서울.경기.인천.충남.강원 지역 자활후견기관 20곳에 소속된 기초수급자 81명과 차상위 계층 19명을 대상으로 지난 2월 21일부터 28일까지 8일간 심층면접 방식으로 진행됐다. 조사 결과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과정에서 국민연금.건강보험.고용보험.산재보험 등 사회보험제도가 빈곤 추락을 막거나 늦추는 데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빈곤 추락의 원인으로는 사업 실패가 33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이혼 등의 가정 해체.질병.빚 보증.실직 등의 순이었다. 이 중에서 빚 보증을 잘못 선 경우는 3년 1개월만에 빈곤층으로 떨어져 가장 짧은 시간에 빈곤층으로 전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가정 해체(4년 1개월), 실직(4년 6개월), 사업 실패(5년), 질병(6년 1개월) 순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혼.별거와 같은 가정 해체를 경험한 사람도 37명이나 됐다. 조사 대상자들은 빈곤으로 빠져들기 직전 월평균 소득이 387만원이었으나 현재는 그때의 5분의 1 수준인 75만원으로 줄었다.

순천향대 김용하 교수는 "경제가 장기 불황 기미를 보이면서 중산층이나 서민들의 빈곤 추락이 계속될 것"이라며 "어려운 처지로 떨어진 사람의 복지를 위해 돈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빈곤층 전락을 예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업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소액 무담보 대출(마이크로 크레디트)▶중병 환자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범위 확대▶자영업자에 대한 산재보험 적용▶이혼시 자녀 양육비 합의 의무화 등 맞춤형 예방 대책 시행과 같은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별취재팀

*** 조사 어떻게 했나
전국 자활후견기관 방문 당사자 면접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을 전후해 중산층.서민(98년 4인가족 기준 월소득 110만원 초과)에서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빈곤층으로 전락한 100명을 심층 면접조사했다. 대상자는 서울 7곳(양천.동작.서대문.은평.성동.강북.노원), 경기 6곳(의정부.군포.평택.포천.광명.안산), 인천 5곳(중.강화.부평), 충남 2곳(공주.예산), 강원 2곳(원주.춘천) 등 총 20개 지역 자활후견기관에서 5명씩 추천받았다. 면접조사는 전문조사원이 올해 2월 21~28일 자활기관을 직접 방문, 그곳 지도원과 함께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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