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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대한민국 기술 명장이 사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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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과제빵업계의 프랜차이즈를 가능케 한 도 컨디셔너를 개발한 김대인씨(왼쪽). 발전기 핵심 부품인 터빈블레이드를 국산화해 발전산업의 초석이 된 두산중공업 이상원씨. 대한민국 명장인 이들은 농업국가인 한국을 첨단공업국으로 발전시킨 선도 인력이다. [부산=송봉근 기자, 오종택 기자]

‘우리는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 전 울릉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운동장에서 교련이란 훈련을 받으며 고등학교(울릉종합고)를 졸업했습니다. 살아보니 그것도 아닌데 이 섬만 벗어나면 꿈이 다 이루어질 줄 알고 친구들 대부분 연락선을 탔습니다. 그 시절 도시는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곳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낯선 곳에서의 삶이란 고단하기 그지없어 의지력이 약한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36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니 수많은 성공의 씨앗들이 우리 주위에 날아다녔는데도 난 그것을 잡을 줄 몰랐지만 이 친구는 한눈팔지 않고 한우물만 파며 노력했습니다. 내 친구 이름은 이상원입니다.’

 지난 6월 23일 경북 울릉군청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이다. 울릉도 대로변에는 ‘축! 이상원, 두산중공업 상무 승진’이라는 플래카드도 걸렸다. 최수일 군수는 축전을 보냈다. 울릉군의 자랑이 된 그는 대한민국 명장(2003년 선정) 이상원(55)씨다. 두산중공업 창원공장에서 발전기 핵심 부품인 터빈블레이드(엔진 날개)를 만든다. 서류를 만지는 임원이 아니라 기름때 묻혀가며 생산 현장을 지키는 두산중공업 최초의 생산직 임원이다.

 이씨가 뭍으로 가는 연락선을 탄 건 1977년. “대학은 꿈도 못 꿨죠. 가난해서 일하느라 결석도 많이 했으니 고교 성적도 나빴습니다. 촌에선 공무원이 최고 아닙니까. 대구로 나가 공무원이 되려 했는데 낙방했습니다.” 대구의 작은아버지가 “울릉도로 돌아가면 오징어잡이밖에 더 하겠느냐”며 낙담한 그를 붙잡아 기술을 배우도록 종용했다. 2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도 평생 오징어잡이 배를 탔다고 한다. 그렇게 국립대구직업훈련원에서 기술인의 문을 두드렸다. 밀링가공기술을 1년간 익힌 그는 현대양행(현 두산중공업) 공채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시 일을 배워야 했다. 이씨는 “당시에는 기업이 쓰는 설비 중에 우리가 생산한 것은 없었습니다. 대부분 미국·독일·영국에서 외국 차관으로 들여온 것이었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죠”라고 말했다. 어깨너머로 기술을 하나씩 익혀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을 무렵 그가 욕심을 낼 일이 생겼다.

 올림픽이 열리던 88년이었다. 회사가 터빈블레이드 설비를 미국에서 들여왔다. 미국에서 한 달간 기술을 익힐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미국 회사 직원들이 넌더리를 냈죠. 밤낮없이 묻고 고가 장비에 붙어 실습하느라 떨어지질 않았으니까요.” 그가 ‘터빈블레이드를 내 손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을 한 게 이때부터라고 한다. 미국을 다녀온 지 3년 만인 91년 그는 증기터빈블레이드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현장 반장 시절이다. 이후 그는 40종의 터빈블레이드를 국산화해 2700억원의 수입대체효과를 거뒀다. 대통령 표창만 세 번, 2011년에는 동탑산업훈장도 받았다.

 자기 사업체를 꾸린 명장도 많다. 김대인(59) 대흥제과제빵기계 대표도 그중 한 명이다. 김씨는 중학교 2학년을 다니다 자퇴했다. 생계를 잇기도 힘든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까까머리 소년은 그 길로 서울 충무로의 수도·냉동기기 설비회사에 들어가 공장에서 숙식하며 허드렛일을 했다. 쫓겨나지 않으려 선배들이 시키는 일은 무조건 해냈다. 지칠 만도 했지만 소년은 독했다. 밤이면 일한 내역을 꼼꼼하게 메모했다. 냉동과 판금 관련 책을 읽으며 불합리한 점이나 결함을 찾아 적었다. 휴일에도 그는 공장을 지켰다. 책과 메모지를 펴 놓고 기계 앞에서 실습을 했다. 공장생활 6년차 때 그는 전국 주요 납품처의 애프터서비스(AS) 담당이 됐다. 김씨는 “일급호텔, 골프장, 아이스크림 공장 같은 거래처를 다니며 ‘나도 내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26세에 사업체를 꾸렸으나 딱 1년 만에 빈털터리가 됐다. 그는 “경험이 없어 좌충우돌하다 끝났다”고 했다. 이후 한 번의 사업 실패를 더 겪은 그는 결국 다시 냉동설비회사 직원으로 취직했다. 그러면서 적금을 부었다. 33세이던 89년 당시 냉동설비산업의 메카이던 청계천8가에 ‘대흥설비’라는 이름으로 점포를 냈다. 그때 자본금이 1000만원이었다. 점포는 작았지만 속은 알토란 같았다. SKC선경화학과 연간 1억원의 보수용역계약을 체결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냉동사업은 한철 사업이잖아요. 고민하다 공조냉동기술을 접목해 도 컨디셔너(Dough Conditioner) 개발에 들어갔죠”라고 말했다. 냉동→냉장→저온발효→고온발효를 거치며 빵을 굽는 기계다. 전날 반죽해 넣어놓으면 다음날 아침에 빵이 나온다. 기계 오류로 빵값을 배상해주기를 반복하다 4년 만에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 기계는 제과제빵업계의 프랜차이즈를 가능하게 했다. 본사에서 반죽 재료만 상점에 공급해주고 시간 맞춰 넣어놓으면 다음날 전국에 설치된 모든 체인점에서 같은 맛의 빵이 나왔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당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대기업에 1400여 대를 납품하기도 했다. 그는 이와 관련된 특허만 8개를 보유하고 있다. 김씨가 개발한 제품은 미국과 일본, 동남아 등지로 수출되고 있다. 그 사이 직원은 70명으로 불었고 매출액은 120억원을 넘어섰다.

 이씨나 김씨 같은 대한민국 명장은 587명이다.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주역이다. 최첨단 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선봉장으로 지금도 산업 현장을 지키고 있다. 대한민국 대표 기술인력인 이들은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떻게 기술을 습득했으며, 어떤 활약을 했을까. 한국노동연구원 조성재 선임연구위원(경제학 박사)이 이런 의문을 풀어줄 만한 연구자료를 내놨다. 86년 명장제도가 도입된 뒤 명장 반열에 오른 213명을 표본 추출해 이들의 이력을 조사했다. 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도 있다. 50대가 46%로 가장 많고, 60대가 37.1%였다.

 이들의 출신·거주지는 한국의 산업화 과정과 거의 일치한다. 영남권 출신이 10명 중 4명이었다. 현 거주지도 10명 중 5명이 영남권이다. 수도권(36.2%)보다 많다. 조 박사는 “수도권을 기점으로 구미공단, 울산공단으로 이어지는 경부 축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진행됐다. 이게 투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호남이나 충청권 출신 명장도 영남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긴 경우가 많았다.

 명장들은 대체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부모 중 3분의 2가 농업에 종사했다. 빈한한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변신하는 과정에 이들 명장이 있고 그 과정을 주도했음을 짐작케 한다. 처음 일을 시작한 나이도 15~19세가 47.4%였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생업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10명 중 4명이 처음 일할 때 중졸 이하 학력인 것은 그래서다.

 그래도 이들의 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못 배운 한(限)을 기술로 풀어내고, 학업도 이어갔다. 44.6%가 전문대졸 이상의 최종 학력을 갖고 있다. 10명 중 4명은 자기 분야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의 한 명장은 “80년대 초반에 장비 사고가 났다 하면 난리가 났다. 누가 책임질지 눈치보기 바빴다. 그런데 난 좋았다. 기계를 뜯어볼 수 있는 기회니까. 공구부터 챙겼다. 퇴근해서도 도면을 연구하느라 밤잠을 자지 않았다. 그렇게 기술력이 높아졌고, 자격증도 하나씩 늘어났다”고 회고했다.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명장도 “기능공 입장에선 자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박사나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이 봤을 땐 한계가 있는 걸로 보거든요. 그래서 대학에 갔죠. 이론을 알게 되니까 그분들과 얘기할 수 있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선 대부분의 명장이 ‘나의 숙련 내용은 중국과 같은 개도국이 따라오기 어렵다’고 자신했다.

 명장들은 이렇게 독학으로 기술을 터득한 경우가 많다. 기업에 근무하는 명장 중 ‘선배에게 배웠다’는 사람이 45.7%로 가장 많지만 두 번째로 많은 것이 ‘스스로 익혔다’(35.7%)였다. 포스코의 한 명장은 “공장에 배치됐을 때 선배들이 안 가르쳐 줘요. 강도나 온도에 따른 특성 같은 걸 비밀 취급하더라고요. 후배한테 노하우를 줘버리면 자기들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결국 어깨너머로 하나씩 터득하고…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후배를 가르칠 땐 ‘작업에 임하는 태도’부터 바로잡는다(30.5%)는 명장이 많았다.

 향후 이들은 어떤 꿈을 또 꾸고 있을까. 현대중공업에 다니는 명장은 “저를 포함한 명장 몇 분이 퇴직 후 70세까지는 후배 양성과 노하우 전수를 하려 합니다. 교육을 위한 사회적 기업을 설립해 기업이나 학생을 상대로 강의를 할까 구상 중입니다. ‘가르쳐 놓으면 다 나라의 인재들이 되겠지’라는 생각에서요”라고 말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하거나(85.4%) 후배를 위한 교육을 하고 싶다(10.3%)는 명장들이 대부분이었다.

◆ 대한민국 명장=숙련기술장려법에 따라 1986년부터 시행됐다. 기계, 전기·전자, 서비스, 공예, 화공, 조선, 섬유와 같은 업종에서 15년 이상 종사한 사람을 대상으로 국가가 심사해 선정한다. 이들은 장려금과 같은 우대를 받는 대신 품위를 유지할 의무를 진다. 품위유지 의무를 어기면 명장 자격이 취소된다.

글=김기찬 선임기자
사진=송봉근·오종택 기자

[S BOX] 명장 되면 2호봉 승급, 정년 뒤 4~5년 재고용도

산업 각 부문에서 활동 중인 대한민국 명장들은 한국 산업의 기술발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공업화에 시동을 걸던 1970년대엔 기초적인 용접과 같은 전통 숙련기술을 익혔다. 그러다 외국의 첨단 기기가 도입되고 자동화되자 그에 맞춘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켰다. 숙련의 내용을 손끝 기술에서 문제해결 기술로 진화시킨 것이다. 기업의 변화를 선도하며 한국 경제를 현장에서 떠받친 사람들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명장을 ‘한국 산업 도전의 역사’라고도 한다.

 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기업마다 좀 다르다.

 두산중공업의 경우 명장 중시 경영을 한다. 사무직이나 생산직의 직급 명칭이 같다. 생산직에서 기업의 별이라는 임원이 탄생할 수 있다. 명장 신청을 회사가 독려한다. 명장이 된 뒤에는 각종 혜택을 준다. 명장이 되는 순간 2호봉이 오른다. 공장 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차량 비표가 주어지고, 사내외 강사로 활동할 수 있도록 강의기법도 교육한다. 정년 퇴직한 뒤에도 4~5년은 재고용된다. 사내에는 명장의 전당을 건립해 핸드프린팅을 조각해주고 명장협의회에 매년 활동비를 지급한다.

 반면 현대자동차에선 명장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 명장으로 선정된 첫 달에 200만원의 장려금을 줄 뿐이다. 명장 신청도 대체로 개인이 알아서 한다. 2007~2010년까지 한 명의 명장도 배출되지 않은 이유다. 한국노동연구원 조성재 선임연구위원은 “숙련 기술자가 일에 대한 흥미를 잃고 영향력이 큰 노조활동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사람의 숙련을 기반으로 하는 도요타와 대비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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