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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직격 인터뷰

김영희 묻고 테오 좀머 답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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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테오 좀머 전 디차이트 발행인은 7일 본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와의 대담에서 통일을 위한 조건으로 정치인의 기민함과 주변국과의 협조를 꼽았다. 그는 “북한의 비핵화는 협상의 선결조건이 아니라 협상의 과정에서 논해야 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김성룡 기자]

11월 9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독일 통일의 길이 활짝 열린 지 25년. 독일은 통일 대박을 누리고 있는데 한반도 통일의 전망은 요원하다. 장벽이 무너진 이후 독일 통일 성공 전략 연구에 매진해온 테오 좀머(82) 전 독일 시사주간지 디차이트 발행인과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가 지난 7일 만나 독일 통일을 이야기했다. 합리적 진보를 지향하는 디차이트의 국제문제 대기자를 지낸 좀머는 채텀하우스(영국왕립국제문제연구소)와 중앙일보·JTBC가 주최한 ‘J 글로벌-채텀하우스 포럼’(6~7일)에 참석하러 서울에 왔다. 좀머는 19세기 말 그때의 연방국가를 독일의 깃발 아래 통일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며 정치인의 리더십을 강조했다. “역사 속을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책무다.” 통일의 기회가 급작스럽게 찾아와도 그걸 놓치지 않는 지도자의 감각과 예지를 강조한 말이다.

김영희=며칠이면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입니다. 통일 후 동서독의 사회·경제·문화적인 통합은 끝난 겁니까.

 테오 좀머=동독 지역에서도 동독으로의 회귀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는 있지만 그건 동독에 특정된 게 아닌 보편적 정서지요. 동서 불균형의 문제가 남아 있긴 합니다.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서독 지역보다 두 배 가까이 높고 동쪽의 1인당 국민소득은 서쪽의 약 70%밖에 되지 않아요. 하지만 동독 지역의 물가가 더 싸다는 점 등 복합적 요인을 고려하면 단순히 ‘동독 지역이 더 살기 나쁘다’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김=동독 지역의 주민들은 통일 독일에서 행복하게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좀머=압도적 다수가 그렇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동독 지역의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서도 의료기술과 자동차 산업 등이 성장하고 있어요. 전후 서독에서도 모든 지역이 골고루 발전한 게 아니라 ‘번영의 섬’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몇몇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이 시작된 것과 같은 이치죠. 흥미로운 건 일방이 아니라 동서 양방향으로 변화가 다방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동서 균일화의 긍정적 단계라고 판단합니다.

 김=만사가 완벽할 수는 없는 법. 통일 과정에 잘못된 부분은 어떤 것들입니까. 한국이 참고하게.

 좀머=통일의 과정에서 동서독의 화폐를 일대일로 교환한 정책은 현실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지금도 비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정책이 경제적으론 옳지 않았을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동독 국영기업 약 1만3000개를 민영화한 정책의 경우도 그래요. 그중 10%의 기업만이 살아남으면서 250만 개의 일자리가 증발했다고 비판받지요. 그러나 동독 기업이 무너진 이유는 그들의 주 고객이었던 소련과 동구권이 “통일 독일 제품은 필요 없다”고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책을 썼다면 또 다른 잘못이 나왔을 겁니다.

 김=사회민주당(SPD)은 1969년부터 동방정책으로 동구권과의 화해를 추구해 통일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통일 총리 헬무트 콜은 기회 있을 때마다 사민당이 통일에 반대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순전히 정치적인 비판입니까, 아니면 그럴만했습니까.

 좀머=통일이 가능했던 건 99%가 동방정책을 편 덕분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콜 총리는 집권하기 이전에는 동방정책을 맹렬히 규탄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집권한 뒤에는 동방정책을 고스란히 계승했어요. 독일에서는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 노선은 급변하지 않습니다. 연속성을 중시하거든요.

 김=한국은 그게 부럽습니다.

 좀머=지금이 88년이라고 가정하고 “독일이 언제 통일될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운이 좋으면 30년 후”라고 답할 겁니다. 그만큼 통일은 느닷없이 찾아왔어요. 그러나 87년의 경우 600만 명의 서독인이 동독을, 500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을 방문하고 서로 상대방의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등 동서 간 교류가 허용됐던 점이 통일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런 교류를 통해 동독 주민들이 자신들의 체제에 답답함을 느껴 대규모 반체제 시위를 벌인 게 큰 동력이 됐습니다. ”

 김=독일 통일이 결과적으로 고르바초프의 입지를 약화시켜 소련의 개혁정책이 파산하고 소련제국의 붕괴까지 가져온 건 아닙니까.

 좀머=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소련 붕괴가 20세기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했지만 독일엔 축복이었지요. 고르바초프가 독일 통일을 지지한 건 그만의 철학적 결단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시 독일 본 주재 소련대사였던 발렌틴 팔린에게 직접 들은 내용입니다만 콜 총리와 고르바초프가 회담한 뒤 팔린이 고르바초프에게 전문을 보내 독일 통일에 찬성하지 말고 독일을 나토에서 탈퇴시키라고 건의합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회신했다고 합니다. “발렌틴, 기차는 이미 떠났다네.” 소련은 당시 동독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그때 동독 주둔 소련군이 40만 명이나 되었어요. 유럽에서 천안문 사태 같은 비극이 벌어질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무력으로 동독 시위를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김=콜 총리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좀머=나는 콜 총리의 팬은 아니지만 그가 통일을 위해 내린 결단을 지지합니다. 비스마르크가 “신이 역사 속을 지나갈 때 그 옷 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다”라고 한 말이 있어요. 콜은 그 말 그대로 눈앞에 전개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변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통일정책을 밀어붙였어요. 일부에선 통일 준비를 위한 헌정위원회 같은 걸 만들어 몇 년간의 과도기를 두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콜은 듣지 않았어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나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통일 독일이 유럽을 이탈해 동구권에 합류할 것”이라고 불안해했지만 그런 우려도 잠재웠어요. 나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합니다.

 김=콜 말고도 서방정책을 수행해 동방정책의 길을 열어준 콘라트 아데나워(1949~63 재임)와 통일정책으로 직결된 동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빌리 브란트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있어서 통일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통일 같은 역사적 과업은 평범함 정치인에게는 벅찬 것입니까.

 좀머=역사학도로서 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인 개인의 힘을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정치인이 비범한지 평범한지는 역사적 순간이 닥쳐오기 전에는 판단하기 힘듭니다. 콜 총리 역시 독일 통일의 기회가 닥치기 전인 재임 초기엔 평범하고 감동을 주지 못한 정치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통일의 기회를 확실히 붙잡았고 그 후에는 아무도 그의 역량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김=비스마르크의 충고처럼?

 좀머=그렇습니다.

 김=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 이후 다시금 한국엔 독일 통일에서 배우자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좀머=통일 후 수년간 한국에서 거의 매주 손님들이 와서 똑같은 질문을 물을 때도 있었어요(웃음). 헨리 키신저는 “역사는 유추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고 한 적이 있는데요. 한반도와 동서독은 상황이 다릅니다만 독일에서 교훈을 유추해볼 수 있겠지요. 핵심은 동서독 모두 핵무기의 위협을 인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유럽의 국제적 연합의 틀을 활용해 데탕트를 단계적 협상을 통해 이뤄나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반도와 동북아에선 현재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다자 기구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방한에선 이와 관련한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어요. 긍정적 신호라고 봅니다.

 김=주변국과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는?

 좀머=그렇습니다. 주변국의 이해관계도 살펴야 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동서독도 미국·소련·프랑스·영국과 2+4 합의를 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를 통해 단계적 협상을 해나갔습니다. 한반도의 경우 북핵 폐기를 대화의 선결 조건으로 내걸고 있는데 그게 과연 지속 가능한 정책인지 의문입니다. 독일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런 문제는 협상의 과정으로 풀어나가야 해요. 북한이 핵에 매달린다고 해도 협상을 우선시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한 리비아의 카다피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걸 봤습니다. 그래서 핵밖에는 믿을 게 없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럴수록 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동감입니다.

 좀머=언젠가는 때가 올 겁니다. 협상의 결과와 협상의 조건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김=북한의 파워엘리트들은 독일 통일 후 동독의 파워엘리트들이 어떤 운명을 맞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봤을 겁니다. 통일정부는 동독 지도층을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좀머=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처벌한다는 기본 원칙에 충실하되 그렇지 않은 자들은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공산주의는 생존을 위한 방식이었을 겁니다. 공산주의 이념 때문만이 아니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또 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길을 택한 것이지요. 오늘날에는 아무도 그들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김=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장기집권하고 있는데 그의 리더십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좀머=독일인들은 그를 ‘무티(Mutti·엄마)’라고 부르며 본능적으로 따르는 것 같아요. 그는 지금까지 독일에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정치가라고 생각합니다. 물리학자 출신이라 이데올로기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가설을 세운 뒤 증명에 실패하면 또 다른 가설을 세우지요. 그가 원자력 발전 진흥 정책을 발표한 약 6개월 후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터졌어요. 메르켈은 곧바로 그 정책을 백지화했지요. 가늠하기 힘든 정치가입니다. 그러나 하겠다고 한 일은 완수해내고, 그래서 존경받습니다. 자신이 내린 결정의 배경을 설명하지 않고 “대안이 없다”는 말만 한다는 건 단점이에요. 별명이 ‘TINA(There is no alternative·대안이 없다)’입니다.

 김=반면에 사민당은 전국선거에서나 지방선거에서 계속 부진한 성적을 냅니다. 사민당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좀머=메르켈 총리가 사민당의 아이디어를 많이 가져가면서 생긴 ‘기민당의 사민당화’ 때문이라고 봅니다. 메르켈 총리도 물러날 때가 올 것이고 그때 기민당이 어떤 정체성을 취할 것인지, 그리고 사민당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주목됩니다.

 김=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정리=전수진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테오 좀머는 …

1930년 독일 콘스탄츠 출생. 스웨덴과 미국 시카고대에서 역사학·정치학·국제관계학 전공. 독일 튀빙겐대에서 박사학위. 독일 시사주간 디 차이트의 전 발행인. 현재는 애틀랜틱타임스의 발행인. 정치와 국제관계에 대한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해왔다. 2000년 이후 한국 전국경제인연합회(FKI) 국제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한·독포럼 공동의장(2002~2008)을 역임했다. 독일 연방 1급 공로 훈장(1998)과 연방군 금 무공 훈장, 한국 수교훈장 숭례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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