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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만 네 개 … 미술관은 내 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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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이 제주시 탑동로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에서 전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뒤의 작품은 수보드 굽타의 ‘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기울어진 배 위에 의자·침대·항아리 따위 살림살이들이 쏟아질 듯 쌓여 있다. 올 가을 서울·제주에 4개의 미술관을 개관한 그는 “3700여 점의 컬렉션 중에서 전시하지 않을 것을 빼는 게 어려웠다”고 말했다. [제주=권근영 기자]

# 장면1=1989년 천안 신부동에 고속터미널이 신축됐다. 쇼핑몰·영화관·갤러리도 함께 들어섰다. 터미널 주인은 이 복합문화공간을 ‘아라리오 스몰 시티’라고 이름붙였다. 앞마당엔 동판에 넣은 준공식 사진이 설치됐다. 헐렁한 양복 차림으로 지역 관료들과 첫 삽을 뜨고 있는, 영락없는 지방 유지의 모습이었다.

 # 장면2=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 세계 미술계의 거물이 모이는 이곳을 새하얀 양복 차림의 한국 남자가 휘젓고 다녔다. 한국에서는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 미국과 유럽에서는 세계 미술계의 ‘파워맨100’, ‘200대 컬렉터’(미국 ‘아트뉴스’, 영국 ‘아트리뷰’지)로 꼽히는 씨킴(CI KIM)이었다.

 # 장면3=지난달 24일 제주시 탑동로, 1999년 지어진 극장 건물이 빨간 미술관으로 리모델링됐다. “제가 오늘 너무 신이 납니다. 노래 한 곡 해도 되겠습니까.” 미술관 설립자 씨킴(63)은 아예 전시장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맨발에 로퍼, 물감 묻은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다. 2014년은 미술관 건립이란 그의 오랜 꿈이 한꺼번에 이뤄지는 해다. 제주의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는 그의 두 번째 미술관이고, ‘아라리오뮤지엄 탑동바이크샵’ ‘아리리오뮤지엄 동문모텔’에 이어 내년 3월 또 하나의 미술관이 제주에 들어선다. 제주에만 4개다. 지난 9월 1일엔 한국 현대 건축의 산실인 서울 율곡로 공간 사옥을 인수해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를 개관했다.

서울 율곡로 옛 공간사옥에 문을 연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사진 위). 제주시에 개관한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 [사진 아라리오뮤지움]

 천안의 버스터미널 주인에서 세계적 컬렉터로, 그리고 5개의 미술관 설립자로….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의 변화무쌍한 삶이다. 부모는 평양 출신으로 1·4 후퇴 때 월남했다. 피난지 부산에서 1951년 태어난 셋째 아들이 그다. 경희대 경영학과 학생이던 75년 건설·금융주에 투자해 돈을 벌었다. 어머니가 빚 대신 인수한 천안 터미널을 그가 맡아 운영했다. 월 300만원 적자에, 어머니에게 월세 300만원을 별도로 내던 상황에서 그는 매점들을 직영으로 돌려 운영난을 타개했다. 이때부터 그림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첫 소장품인 청전 이상범의 산수화는 지금 그의 첫 미술관인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 걸려 있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개관을 앞두고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간 사옥은 그 건축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버려진 건물이었다. 그곳에 예술이 들어갔을 때 어떻게 변화할지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좁은 계단의 벽돌 건물, 옛 모습 그대로 개장했다. 건물의 과거 기억을 유지하면서 미술관으로 변모시키는 그의 구상은 제주도에서도 이어진다.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 자리는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제주 첫 복합상영관이었다가 폐관됐던 곳이다. 제주 바다가 보이는 탑동시네마 앞엔 직영 빵공장, 이탈리아 식당이 개장을 준비중이다. 70년대 매점 직영으로 경영난을 타개한 사업가다운 방식이다.

 그러나 논란도 있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엔 바바라 크루거, 키스 헤링, 마크 퀸, 트레이시 에민 등 현대 미술 거장의 작품을 전시하고 마지막에 본인 작품을 내놓았다. 그는 직접 작품 활동도 한다.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에도 앤디 워홀, 지그마르 폴케 등 거장의 작품이 자리잡은 5층 건물의 3층에 본인 작품을 배치했다.

 - 아무리 개인 미술관이어도 자기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심하지 않나.

 “인생이 예술이고, 예술이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같은 미술관을 만든 씨킴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 함께 전시된 거장들에게 묻어가겠다는 건가.

 “내 세계는 현재 이들 작가들에게 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허나 후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알 수 없다. 도전과 모험은 중요하다. 욕 먹는 거 알지만, 이렇게 거스르는 사람이 하나쯤 있어도 되지 않나.”

 - 미술관을 여는 목적은.

 “본능이자 운명이다. 한국 미술을 가치있게 보여주기 위해선 전시 공간이 많아야 하며, 나 같은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

제주=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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