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인의 삶 자체가 그에겐 예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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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호 19면

자신의 작품 ‘두 개의 불렛’ (2014) 앞에 선 수보드 굽타.

예술은 평범한 삶의 한가운데서 시작된다. 가장 글로벌한 작품은 역설적으로 로컬 문제에 가장 충실할 때 탄생한다. 인도의 수보드 굽타(Subodh Gupta·50)는 이 명제를 작품으로 보여주는 작가다. 2000년대 이후 세계 여러 비엔날레와 현대 미술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으로 부상한 그의 작품은 인도의 현재적 삶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세계적인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새로 문을 연 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8월 29일~10월 26일)에서,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 서울(9월 1일~10월 5일)에서 열리고 있는 수보다 굽타 개인전은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신성하다”는 작가의 지론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서울과 상하이 전시 외에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 전시를 앞두고 짧은 일정으로 서울에 들린 수보드 굽타를 만났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서 전시회, 인도 작가 수보드 굽타

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에 전시 중인 커다란 금빛 하트 모양의 조각 ‘러브’는 형태상 제프 쿤스의 ‘매달린 하트(Hanging Heart)’를 연상시킨다. 굽타의 이 작품은 인도에서 주식으로 먹는 빵을 만들 때 사용하는 집게 ‘침타(Chimta)’로 만들었다. ‘매달린 하트’가 번쩍거리는 무결점의 외피로 공허함을 겨우 감추고 있다면, 수많은 집게로 이루어진 풍부한 질감을 가진 굽타의 작품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지만 굽타는 인도 뉴델리에 있는 작업실을 창작의 허브로 삼고 있다. 인도의 삶 자체가 그의 작품 속으로 부단히 흘러들어 간다. 괄목할만한 경제적 성장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온존하고 있는 오랜 식민지 역사와 카스트 제도라는 엄격한 신분제가 남아있는 인도 사회의 특수성을 작품 속에 차곡차곡 쌓고 있다.

굽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재해석해서 성과 속, 과거와 현재, 일상과 신성 등 인도 사회의 모순적 양면성을 담아낸다. 현실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습적인 사고의 틀을 성찰하고 그 의미를 전복시킨다.

대형 설치작품 ‘이것은 분수가 아니다’를 보자. 인도 가정에서 흔히 쓰이는 수천 개의 헌 놋그릇들 위로 수도꼭지에서 물이 계속 흐른다(이 작품을 위해 갤러리는 전면적인 공사를 해야 했다). 물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위해 존재하지만 카스트제도가 온존하고 있는 인도에서 불가촉 천민에게는 공동 우물의 사용조차 금지되고 있다. 인간이 만든 종교·관습·사회적 관계의 프리즘에 의해 보편재들의 사용이 차별받는 상황을 굽타는 돌아보게 한다.

스테인리스 스틸 그릇이나 조리용품 같은 다양한 부엌 도구들이 작품의 주요 소재다.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요는 당신의 작품이 ‘부엌에서 시작한다’고 했는데.
“내 작품에는 자서전적인 내용이 많다. 난 동인도의 가난한 지역인 비하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세 누이 사이에서 자라면서 여성적인 도구를 일찌감치 접했다. 인도에서 부엌은 기도실만큼 신성한 공간이면서 인도 사회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힌두교가 지배하는 인도에서 남은 음식은 매우 부정한 것으로 여겨왔다. 여성도 남성보다 부정한 존재로 여겨져서, 인도 여성들은 남성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고 남긴 음식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남긴 음식에 여러 향신료를 넣어 마술처럼 새로운 음식으로 만드셨다. 이번에 나는 일기를 쓰듯이 내가 먹은 음식들의 빈 접시들을 그려서 멋진 액자에 담았다. 그것은 서양식 바니타스 회화의 죽음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나를 만족시켰던 음식에 대한 기억의 기록들이다.”

인도에는 여전히 종교가 중요한 사회인 것 같다. 당신에게 종교의 의미는.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지만 특정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작품은 어떤 성스러움 자체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토대로부터 솟아나온다. 세속적이고 흔한 것을 작품으로 녹여 내는 것이 내 작업의 목표다.”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물건들이 어떻게 영감을 주는가.
“나는 이전에 ‘우상 도둑(Idol thief)’이라는 말로 나 자신을 설명한 적이 있다. 원래 우상(Idol)이라는 것은 일상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메타포로 이해한다. 500년 된 옛 조각품들이 외국에서 숭배되며 전시되는 것처럼, 나는 일상의 사물들을 훔쳐서 그것들이 전시장에서 전시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풍경은 늘 거기에 있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풍경이 달라 보이는 체험을 하게 된다. 평범하고 늘 거기에 있는 것이지만 다르게 보이는 사물들이 내게는 작품이 된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나 밀레의 ‘만종’에서처럼 감자는 가장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담는 소재다. 그런데 당신에게 와서는 황금으로 도금이 됐다. 이 작품도 같은 맥락인가.
“인도에서 서민들이 가장 즐겨먹는 것이 감자다. 감자를 실제로 캐스팅해서 청동으로 만들고 24K로 도금했다. 인도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빠른 서구화의 과정을 암시하고 싶었다.”

인도의 신화적인 요소도 세속적인 삶을 해독하는 맥에서 풀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모든 것을 통째로 삼켜라’라는 작품은 인도의 신 브라흐마(Brahma)와 비슈누(Vishnu) 신 사이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파괴의 신 비슈누 앞에서 창조의 신 브라흐마가 모든 걸 다 삼켜버릴 수 있다고 자랑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신화에서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인도인들에게 모든 음식을 다 먹을 수 있는 자유는 없다. 모든 음식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적인 관습 때문에 상류층일수록 소고기 같은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는다. 절대로 먹을 수 없는 딱딱한 시멘트가 숟가락 위에 얹어져 있는 것은 이런 상황을 은유한다.”

인도뿐 아니라 국제·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
“그렇다. 예컨대 1층에 있는 두 개의 드럼통은 걸프전에 관한 것이다. 석유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정치적인 상황을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다. 수저 위에 작은 해골이 잔뜩 올라간 작품 ‘Thoughts’도 이러한 상황을 빗대 표현한 것이다. 시리아 사태, 이라크 전 등 이 모두가 끔찍한 재난이다. 세계 도처에서는 재난이 끊이지 않지만, 우리는 재난 뉴스에 너무 익숙해져서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을 뿐이다. 스푼은 일종의 안전 지대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무대다. 먼 나라 일이라고 치부하지만, 우리는 안전 지대에 있으면서 이렇게 수많은 해골로 상징된 재난 뉴스를 듣고 먹고 살고 있다.”

전 세계가 끔찍한 사건들을 겪고 있다. 예술은 세상의 고통을 치유할 수가 있는가.
“미술은 언어 이전의 그 무엇이다. 아이, 노인, 중년 각자 처지가 다른 사람들이 똑 같은 작품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작품을 보고 느끼는 과정은 모두 같지 않을 것이다. 작품을 각자 읽어내면서 내적으로 반응하는 과정이 바로 치유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최근 당신을 비롯해 인도 출신 작가들이 세계 미술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실 인도의 현대미술 전통은 70년이 채 안 된다. 이렇게 짧은 역사 속에서도 여러 작가가 주목 받는 것은 아무래도 인도의 경제력이 성장했기 때문 아닐까 한다.”



수보드 굽타 1964년 인도의 불교 중심지인 비하르(Bihar)의 카구알에서 철도원 아버지와 독실한 불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파트나 미대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14년 인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비롯해 일본 삿포로 국제예술제, 모나코 그리말디포룸에서 열린 피노 컬렉션 전시 등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부인 바티 커(Bharti Kher·45) 역시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다.


글 이진숙 미술평론가 kmedichi@hanmail.net,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아라리오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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